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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물가물하다. 엊그제 점심을 누구와 무엇을 먹었는지, 결혼식장에서 만난 그 친구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머릿속을 더듬다 보면, 빠르게는 몇 초, 좀 더 가면 1∼2분 사이에 용케 기억이 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한참을 갸웃거리다 그냥 덮어버리고 만다.
언제부터인가, 외우고 있는 전화번호라곤 내 휴대전화와 집 전화뿐. 아내와 아이들 번호조차 ‘연락처→ 즐겨찾기’를 눌러보아야만 알 수 있다. 영어 단어나 한자의 획이 헷갈리는 건 말할 것도 없고, 한때 누구보다 자신 있었던 길눈도 이젠 목적지 주변을 한두 번 맴돌게 되는 때가 적지 않으니. 단순한 건망증일 12월결산법인배당락 까? 아니면, 사람들이 우스갯소리처럼 말하는 치매의 초기 증상일지도 모른다. 정확한 진단을 받아봐야 알겠지만, 어쨌든 기억력에 있어서는 팔다리의 기력처럼 시나브로 시들어가고 있음이 분명하다.
누군가는 웃으며 말한다. 그냥 마음 편히 관대해지라고. 누구나 겪는 자연스러운 노쇠 현상이고, 그러한 증세(?)로 특별히 엄청나게 불편한 일이 없다면 주택사업자 그에 순응하고 나룻배에 실려 떠내려가듯 몸을 맡기는 것도 스트레스를 덜 받고 사는 삶의 방식 중 하나라고.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러나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때마다 솟구치는 일말의 불안감을 어찌할 수 없다. 바로 가족력, 아버지께서 치매를 앓다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처음엔 그저 소일거리로 그러시려니 했다. 한 달에 서너 번 부모님 댁을 찾 아파트소유 아뵙는 ‘의례적 행사’로 장남으로서 의무를 지켜간다고 하던 어느 날, 아버지가 일기를 쓰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우연히 문갑 위에 놓인 다이어리 수첩을 무심코 펼쳤을 때, 하루 치로 줄이 그어진 열댓 칸마다 웬 기록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는 게 아닌가. 수십 년을 보아온 익숙한 필체, 옆으로 누운 듯 둥글둥글한 아버지의 글씨가 하루의 일상과 만난 농협 국민행복기금 사람, 걸거나 걸려온 통화 내용까지 잡다한 사연들을 거푸 토해내듯 담고 있었다.



노년의 부모님. 1921년 4월생 동갑인 두 분은 17세에 결혼한 후 70년을 함께하셨다.


의외이긴 했지만, 이전에도 북에 두고 온 게릴라특가 당신의 부모 형제라든지, 고향마을에 관한 이야기를 공책 등에 남긴 글을 가끔 본 적이 있던 터라, 일기 쓰기도 그 연장선상이겠거니 생각했다. 그 이후로 부모님 댁에 갈 때면 일부러 일기장을 찾아 한 번씩 훑어보곤 하는 일이 습관처럼 되어버렸다. 하루도 빠짐없이 빽빽이 쓰셨으니, 며칠 사이의 행적이 어떠하셨는지를 알 수 있는 좋은 블랙박스였다고나 할까.
그러던 중 일기에서 이상한 변화가 눈에 띄기 시작했다. 어느 시점부터 한글 철자법과 한자의 틀리는 빈도가 잦아졌고, 차츰 글자가 풀어지기도 하면서 칸을 벗어나고 있는 것이었다. 중언부언의 표현도 늘었고, 그와 함께 정정과 가필의 흔적이 잦아졌다. 그러나 그 당시만 해도 그저 ‘연세 드시니 그러실 수도 있겠지’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고, 때때로는 알아보기 힘들게 흩어진 자음과 모음들을 퍼즐처럼 꿰맞춰 보는 재미를 즐기기까지도 했다.
아들 이강식(프로젝트 좋은 세상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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