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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혜린 작가. 경향신문 자료사진
글 쓰는 사람이 되기를 꿈꾸는 소녀들에게 전혜린이라는 이름은 건너뛸 수 없는 통과제의이다.¹ 전혜린의 유고 에세이집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1966)는 한 시절 문학소녀들의 책장에 어김없이 꽂혀 있던 필독서 같은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소녀들은 문학을 사랑하게 됐고, 유럽의 한 도시를 동경하게 됐으며, 무엇보다 글을 읽고 쓰는 미래를 꿈꾸었다. 소설가 전경린은 199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소설이 당선됐을 때 지인이 붙여준 아호 ‘경인’ 앞에 ‘전’자를 붙인 필명을 쓰기로 결정한다. ‘안애금’에서 모바일야마토 ‘전경린’으로 이름을 바꾸기로 했을 때 그의 마음에 들어와 있던 인물이 전혜린이다. 전경린은 자신이 전혜린의 에세이를 많이 읽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전혜린이 “소설을 한 편도 쓰지 못했다는 게 너무 안타까워” 자신이 “대신 써나간다는 마음으로 작업을 해나가고 싶다”고 말한다. 전혜린에 대한 단행본을 쓴 김용언은 이 이야기를 들려주며 “문학소녀, 나도, 당 바다이야기사이트 신도 전혜린이었다”고 선언한다. “우리가 전혜린이었다”는 선언은 읽고 쓰기를 꿈꾸는 문학소녀들의 커밍아웃이다.
오랫동안 전혜린은 읽고 쓰기를 갈망했던 여자들이 흠모했던 인물이지만, 남성 비평가들이 ‘작가’로 부르기를 주저했던 존재이기도 하다. 그는 글 쓰는 여자들에게 따라붙는 ‘작품 없는 작가’라는 비아냥에 오랫동안 시달렸다. 서른한 살이 바다신2 다운로드 라는 젊은 나이에 자살로 추정되는 돌연한 죽음은 그를 세간의 풍문과 호기심의 대상으로 만들었지만, 그가 이룬 문학적 성취에 대한 인정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전혜린의 글은 “비범함을 열망했던 평범한 여성의 평범한 마음의 풍경을 보여준다”라고 한 고종석의 평가는 더없이 냉담하고 가차 없다. 전혜린은 소설, 시, 희곡같이 문학 제도의 승인을 받은 주류 장르가 아 릴게임갓 닌 수필 나부랭이나 쓰는 여자, 그것도 자기중심에 빠진 소녀 취향의 감상적 수필을 쓰는 여자로 소환됐다. 그가 수필 못지않게 심혈을 기울인 번역 역시 창작에 미달하는 잡문 같은 것으로 여겨져 진지한 논의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전혜린을 다시 읽을 시점에 도달
지난 10여 년간 젊은 여성 연구자들의 노력으로 이런 시각은 어 뽀빠이릴게임 느 정도 교정됐다. 1950년대와 1960년대 한국 문학장에서 수필가이자 독문학 번역자로서 전혜린의 문학세계에 대한 연구는 상당히 축적됐다. 이제 더 이상 그는 “미숙한 실존주의”와 “자기중심주의”에 빠져 현실에 발을 담그지 못해 소설을 쓰지 못한 아마추어 수필가, 이국적인 유럽문화를 한국에 이식시킨 서구중심주의에 빠진 번역자로만 읽히지 않는다. 전경린은 전혜린이 소설을 한 편도 쓰지 못했다는 것을 몹시 아쉬워했지만, 수필과 번역도 소설 못지않게 중요한 의미를 지닌 문학 행위라는 것을 밝히는 연구가 속속 출현했다. 장르 서열주의에 빠지지 않고 전혜린을 다시 읽을 시점에 도달한 것이다.
전혜린은 1934년 평안남도 순천에서 조선총독부 고위 관리 전봉덕의 1남 7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그는 이식된 일본 근대 문화와 제국주의의 하위 파트너였던 식민지 최상층 관료의 돈과 문화 자본이 길러낸 엘리트 여성이다. 전혜린은 “식민지 시대 출세주의와 교양주의의 모순된 결합”이었던 아버지로부터 책과 정신의 세계에 대한 헌신을 물려받았다. 그는 “마치 제단 앞에 향불을 갖다 쌓듯” 아버지를 대상으로 지식을 쌓아 올리고 아버지의 인정을 받고자 했던 ‘아버지의 딸’이었다. 그가 당시에는 드물었던 독일 유학길에 올라 독일의 정신적 풍요로움과 지적 탐구를 열렬히 숭배했던 것도 아버지의 재력과 교양 덕분이었다.
뮌헨의 ‘슈바빙’은 전혜린이 찾아낸 영혼의 고향이다. 그곳에서 그는 속물적 세계에 대한 혐오와 이데아를 추구하는 금욕적 정신주의를 발견한다. 슈바빙은 전후 한국의 현실에서 맞닥뜨려야 했던 전쟁의 폐허와 가난과 이데올로기적 대립에서 벗어난 순수 관념의 세계, 사회적 제약에서 벗어나 정신세계에 몰두할 수 있는 자유가 살아 숨 쉬는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전혜린은 “구라파적인 것”에 “매혹당하고 정복당할 것” 같은 예감에 빠진다. 그는 동생 채린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국의 문학은 “창작인데 테마에 대한 명징한 집중이 없고, 자기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모르고 있다”고 비판한다. 지성의 결핍을 날카롭게 지적하는 이런 힐난 뒤에 그는 동생에게 “서구의 지성을 지향해줘! 한국적으로 머물지 말아줘!”라고 조언한다.
한국문학에 대한 전혜린의 신랄한 평가는 한국적 현실을 무시한 서구 추종주의로 비칠 수 있다. 그가 가장 비판받는 지점이 이 부분이다. 뮌헨대학에서 유일한 한국인 여학생이었던 그는 한국과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의 교양과 지식을 축적해온 유럽의 문화를 부러워하면서 사치와 물질주의에 오염된 한국을 혐오하고 멸시한다. 전혜린은 이런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자신이 “유럽 콤플렉스”에 빠진 것 같다는 자조 섞인 고백을 하기도 한다. 그가 유럽적인 것을 이상화하는 심리적 기저에는 분단과 전쟁, 군사 쿠데타와 독재로 이어지는 속물적 현실로부터 자신을 지키려는 방어적 욕망이 작용했을 수 있다. 특히 강렬한 정신주의적 지향을 가슴에 품고 있으면서 아내이자 엄마이자 생활인으로서 일상적 현실에 발목 잡혀 있다고 느낀 그는 자신이 번역한 독일작품 속의 인물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싶어했다. 독일 문학 속 인물은 그가 추구하고자 했으나 현실의 벽에 부딪혀 놓쳐버린 숭고한 가치를 흔들림 없이 살아내는 이상적 모델이다.
민서출판 제공
끝까지 자유로운 개인으로 남기를 갈망
전혜린은 1955년 독일 유학 시절부터 시작한 번역 작업을 죽을 때까지 계속했다. 그는 총 11권에 이르는 작품을 번역한다. 그의 번역 목록은 그가 쓴 수필집 목록보다 길다. 그만큼 그는 번역을 자투리 부업이 아니라 중요한 문학적 활동으로 여겨 성실히 임했다. 전혜린은 한국에서 일본이라는 매개를 거치지 않고 자신이 직접 작품을 선정하고 일본어 중역이 아닌 독일어에서 바로 번역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번역가 중의 한 사람이었다. 독문학자들의 평가에 따르면, 전혜린은 한국에서 독일문학을 가장 한국어답게 옮긴 최초의 번역가라고 한다. 그가 선정해 번역한 작품들은 한국에 처음 소개돼 많은 사람에게 읽히는 작품 목록을 구성했다.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은 전혜린이 특히 아꼈던 작품이다. 그는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에 대해서는 직접 서평을 작성해 작품의 의미를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했다.
“린저가 생의 한가운데에서 그린 니나라는 여인 초상은 매우 특이한 초상이다. 그러나 온갖 것의 본질은 그의 특이성 속에 가장 뚜렷이 표현되는 것이므로 이 초상화 속에서 우리는 여자의 모든 문제성을 날카롭게 파악할 수 있는 것 같다.
무엇보다 자유를, 정신의 자유를 희구하는 그의 본능적인 충동에 지배되어 맑은 두뇌의 지성과 결정적인 성격 때문에 언제나 극단적인 상황 속에 몸을 내맡기고 생과 사의 양극 사이를 줄타기하는 것 같은 위태로운 몸짓으로, 그러나 승리에 넘치는 긍정을 가지고 살고 있는 여자이다.” (<생의 한가운데> 중)
전혜린에게 니나는 그가 자신의 삶에서 고민하는 문제의 해결책을 찾을 수 있고, 자신이 놓쳐 버린 가치를 되찾을 수 있는 여성으로 다가온다. 박숙자는 전혜린에게 번역은 “자신의 삶의 태도가 투사된 또 다른 방식의 실존적 해석이었으며, 번역을 통해 자기 정체성을 조형해 나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에세이스트로서의 정체성 못지않게 번역가로서의 정체성이 전혜린의 삶과 문학세계를 규정하는 중요한 특성이다.
번역은 의미를 등가적으로 교환하거나 일방적으로 수용하는 작업이 아니라 특정한 맥락에서 타문화를 해석하고 변용해들이는 행위다. 이런 의미에서 번역가는 문화적 경계가 위반되고 포개지는 접촉지대에서 이질성과 혼종성을 매개하는 행위자다. 그는 원본과 번역본 사이의 경계에서 어느 한쪽으로 귀속되지 않고 양자를 접촉시키고 변용한다. 이런 번역자로서의 정체성이 전혜린을 문화의 경계에서 불안정하게 서성이는 무국적 자유인으로 만들어주었던 것 같다. 전혜린은 민족주의로 귀환하는 당대 다수의 여성 문인과 달리 끝까지 자유로운 개인으로 남고자 했다. 그러나 단독적 개인으로서 자신의 실존적 가능성을 실현하기에 당대 한국사회는 지나치게 가부장적이었고, 민족주의적이었고, 권위주의적이었다.
1. 박숙자, ‘여성은 번역할 수 있는가-1960년대 전혜린의 죽음을 둘러싼 대중적 애도를 중심으로’, <서강인문논총> 38. 2013. 34쪽.
이명호 경희대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글 쓰는 사람이 되기를 꿈꾸는 소녀들에게 전혜린이라는 이름은 건너뛸 수 없는 통과제의이다.¹ 전혜린의 유고 에세이집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1966)는 한 시절 문학소녀들의 책장에 어김없이 꽂혀 있던 필독서 같은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소녀들은 문학을 사랑하게 됐고, 유럽의 한 도시를 동경하게 됐으며, 무엇보다 글을 읽고 쓰는 미래를 꿈꾸었다. 소설가 전경린은 199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소설이 당선됐을 때 지인이 붙여준 아호 ‘경인’ 앞에 ‘전’자를 붙인 필명을 쓰기로 결정한다. ‘안애금’에서 모바일야마토 ‘전경린’으로 이름을 바꾸기로 했을 때 그의 마음에 들어와 있던 인물이 전혜린이다. 전경린은 자신이 전혜린의 에세이를 많이 읽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전혜린이 “소설을 한 편도 쓰지 못했다는 게 너무 안타까워” 자신이 “대신 써나간다는 마음으로 작업을 해나가고 싶다”고 말한다. 전혜린에 대한 단행본을 쓴 김용언은 이 이야기를 들려주며 “문학소녀, 나도, 당 바다이야기사이트 신도 전혜린이었다”고 선언한다. “우리가 전혜린이었다”는 선언은 읽고 쓰기를 꿈꾸는 문학소녀들의 커밍아웃이다.
오랫동안 전혜린은 읽고 쓰기를 갈망했던 여자들이 흠모했던 인물이지만, 남성 비평가들이 ‘작가’로 부르기를 주저했던 존재이기도 하다. 그는 글 쓰는 여자들에게 따라붙는 ‘작품 없는 작가’라는 비아냥에 오랫동안 시달렸다. 서른한 살이 바다신2 다운로드 라는 젊은 나이에 자살로 추정되는 돌연한 죽음은 그를 세간의 풍문과 호기심의 대상으로 만들었지만, 그가 이룬 문학적 성취에 대한 인정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전혜린의 글은 “비범함을 열망했던 평범한 여성의 평범한 마음의 풍경을 보여준다”라고 한 고종석의 평가는 더없이 냉담하고 가차 없다. 전혜린은 소설, 시, 희곡같이 문학 제도의 승인을 받은 주류 장르가 아 릴게임갓 닌 수필 나부랭이나 쓰는 여자, 그것도 자기중심에 빠진 소녀 취향의 감상적 수필을 쓰는 여자로 소환됐다. 그가 수필 못지않게 심혈을 기울인 번역 역시 창작에 미달하는 잡문 같은 것으로 여겨져 진지한 논의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전혜린을 다시 읽을 시점에 도달
지난 10여 년간 젊은 여성 연구자들의 노력으로 이런 시각은 어 뽀빠이릴게임 느 정도 교정됐다. 1950년대와 1960년대 한국 문학장에서 수필가이자 독문학 번역자로서 전혜린의 문학세계에 대한 연구는 상당히 축적됐다. 이제 더 이상 그는 “미숙한 실존주의”와 “자기중심주의”에 빠져 현실에 발을 담그지 못해 소설을 쓰지 못한 아마추어 수필가, 이국적인 유럽문화를 한국에 이식시킨 서구중심주의에 빠진 번역자로만 읽히지 않는다. 전경린은 전혜린이 소설을 한 편도 쓰지 못했다는 것을 몹시 아쉬워했지만, 수필과 번역도 소설 못지않게 중요한 의미를 지닌 문학 행위라는 것을 밝히는 연구가 속속 출현했다. 장르 서열주의에 빠지지 않고 전혜린을 다시 읽을 시점에 도달한 것이다.
전혜린은 1934년 평안남도 순천에서 조선총독부 고위 관리 전봉덕의 1남 7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그는 이식된 일본 근대 문화와 제국주의의 하위 파트너였던 식민지 최상층 관료의 돈과 문화 자본이 길러낸 엘리트 여성이다. 전혜린은 “식민지 시대 출세주의와 교양주의의 모순된 결합”이었던 아버지로부터 책과 정신의 세계에 대한 헌신을 물려받았다. 그는 “마치 제단 앞에 향불을 갖다 쌓듯” 아버지를 대상으로 지식을 쌓아 올리고 아버지의 인정을 받고자 했던 ‘아버지의 딸’이었다. 그가 당시에는 드물었던 독일 유학길에 올라 독일의 정신적 풍요로움과 지적 탐구를 열렬히 숭배했던 것도 아버지의 재력과 교양 덕분이었다.
뮌헨의 ‘슈바빙’은 전혜린이 찾아낸 영혼의 고향이다. 그곳에서 그는 속물적 세계에 대한 혐오와 이데아를 추구하는 금욕적 정신주의를 발견한다. 슈바빙은 전후 한국의 현실에서 맞닥뜨려야 했던 전쟁의 폐허와 가난과 이데올로기적 대립에서 벗어난 순수 관념의 세계, 사회적 제약에서 벗어나 정신세계에 몰두할 수 있는 자유가 살아 숨 쉬는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전혜린은 “구라파적인 것”에 “매혹당하고 정복당할 것” 같은 예감에 빠진다. 그는 동생 채린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국의 문학은 “창작인데 테마에 대한 명징한 집중이 없고, 자기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모르고 있다”고 비판한다. 지성의 결핍을 날카롭게 지적하는 이런 힐난 뒤에 그는 동생에게 “서구의 지성을 지향해줘! 한국적으로 머물지 말아줘!”라고 조언한다.
한국문학에 대한 전혜린의 신랄한 평가는 한국적 현실을 무시한 서구 추종주의로 비칠 수 있다. 그가 가장 비판받는 지점이 이 부분이다. 뮌헨대학에서 유일한 한국인 여학생이었던 그는 한국과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의 교양과 지식을 축적해온 유럽의 문화를 부러워하면서 사치와 물질주의에 오염된 한국을 혐오하고 멸시한다. 전혜린은 이런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자신이 “유럽 콤플렉스”에 빠진 것 같다는 자조 섞인 고백을 하기도 한다. 그가 유럽적인 것을 이상화하는 심리적 기저에는 분단과 전쟁, 군사 쿠데타와 독재로 이어지는 속물적 현실로부터 자신을 지키려는 방어적 욕망이 작용했을 수 있다. 특히 강렬한 정신주의적 지향을 가슴에 품고 있으면서 아내이자 엄마이자 생활인으로서 일상적 현실에 발목 잡혀 있다고 느낀 그는 자신이 번역한 독일작품 속의 인물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싶어했다. 독일 문학 속 인물은 그가 추구하고자 했으나 현실의 벽에 부딪혀 놓쳐버린 숭고한 가치를 흔들림 없이 살아내는 이상적 모델이다.
민서출판 제공
끝까지 자유로운 개인으로 남기를 갈망
전혜린은 1955년 독일 유학 시절부터 시작한 번역 작업을 죽을 때까지 계속했다. 그는 총 11권에 이르는 작품을 번역한다. 그의 번역 목록은 그가 쓴 수필집 목록보다 길다. 그만큼 그는 번역을 자투리 부업이 아니라 중요한 문학적 활동으로 여겨 성실히 임했다. 전혜린은 한국에서 일본이라는 매개를 거치지 않고 자신이 직접 작품을 선정하고 일본어 중역이 아닌 독일어에서 바로 번역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번역가 중의 한 사람이었다. 독문학자들의 평가에 따르면, 전혜린은 한국에서 독일문학을 가장 한국어답게 옮긴 최초의 번역가라고 한다. 그가 선정해 번역한 작품들은 한국에 처음 소개돼 많은 사람에게 읽히는 작품 목록을 구성했다.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은 전혜린이 특히 아꼈던 작품이다. 그는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에 대해서는 직접 서평을 작성해 작품의 의미를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했다.
“린저가 생의 한가운데에서 그린 니나라는 여인 초상은 매우 특이한 초상이다. 그러나 온갖 것의 본질은 그의 특이성 속에 가장 뚜렷이 표현되는 것이므로 이 초상화 속에서 우리는 여자의 모든 문제성을 날카롭게 파악할 수 있는 것 같다.
무엇보다 자유를, 정신의 자유를 희구하는 그의 본능적인 충동에 지배되어 맑은 두뇌의 지성과 결정적인 성격 때문에 언제나 극단적인 상황 속에 몸을 내맡기고 생과 사의 양극 사이를 줄타기하는 것 같은 위태로운 몸짓으로, 그러나 승리에 넘치는 긍정을 가지고 살고 있는 여자이다.” (<생의 한가운데> 중)
전혜린에게 니나는 그가 자신의 삶에서 고민하는 문제의 해결책을 찾을 수 있고, 자신이 놓쳐 버린 가치를 되찾을 수 있는 여성으로 다가온다. 박숙자는 전혜린에게 번역은 “자신의 삶의 태도가 투사된 또 다른 방식의 실존적 해석이었으며, 번역을 통해 자기 정체성을 조형해 나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에세이스트로서의 정체성 못지않게 번역가로서의 정체성이 전혜린의 삶과 문학세계를 규정하는 중요한 특성이다.
번역은 의미를 등가적으로 교환하거나 일방적으로 수용하는 작업이 아니라 특정한 맥락에서 타문화를 해석하고 변용해들이는 행위다. 이런 의미에서 번역가는 문화적 경계가 위반되고 포개지는 접촉지대에서 이질성과 혼종성을 매개하는 행위자다. 그는 원본과 번역본 사이의 경계에서 어느 한쪽으로 귀속되지 않고 양자를 접촉시키고 변용한다. 이런 번역자로서의 정체성이 전혜린을 문화의 경계에서 불안정하게 서성이는 무국적 자유인으로 만들어주었던 것 같다. 전혜린은 민족주의로 귀환하는 당대 다수의 여성 문인과 달리 끝까지 자유로운 개인으로 남고자 했다. 그러나 단독적 개인으로서 자신의 실존적 가능성을 실현하기에 당대 한국사회는 지나치게 가부장적이었고, 민족주의적이었고, 권위주의적이었다.
1. 박숙자, ‘여성은 번역할 수 있는가-1960년대 전혜린의 죽음을 둘러싼 대중적 애도를 중심으로’, <서강인문논총> 38. 2013. 34쪽.
이명호 경희대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