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펜하이머(오른쪽), 아인슈타인과 함께.
2023년 개봉 영화 ‘오펜하이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핵무기 개발을 주도한 미국 물리학자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1904~1967)의 삶을 다룬다. 이듬해 3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감독·남우주연상 등 7관왕에 올랐다.
오펜하이머는 1942년 ‘맨해튼 프로젝트’로 이름한 핵무기 개발 책임을 맡았다. 자신이 개발한 원자폭탄이 1945년 8월 실제로 사용된 후 공포와 죄책감을 느꼈다. 이후 수소폭탄 제조에 반대하고 반전 운동을 펼쳤다.
골드몽사이트 영화 '오펜하이머' 포스터.
오펜하이머는 1954년 공직에서 추방됐다. 그해 열린 보안 취급 인가 취소 청문회에서 공산주의자로 몰렸다. 소련이 핵무기를 개발하고 냉전이 심화되던 때였다. 조지프 매카시 상원의원은 “정부 내 공산주의자가 침투해 있다”고 주장하며
바다이야기무료머니 공산주의자 색출 작업인 ‘매카시 선풍’을 일으켰다.
“로버트 오펜하이머 박사가 위험 인물로 정직 처분을 당한 것은 금년 미국에서 처음 보는 일대 ‘센세이숀’을 일으키고 맥카시 의원의 원자폭탄 및 수소폭탄 비밀보장 문제와 결부시켜 놓았다. 오펜하이머 박사의 정직 처분이 발표된 것은 공산주의자들이 미국의 수폭(水爆) 발전을 지연시켰으며 동
릴게임추천 지연은 미국에 대하여 치명적인 것일는지도 모른다는 상원의원 맥카시씨(氏)의 비난을 위요(圍繞)하고 정치적 분규가 약 일주일간 계속된 후였다.”(1954년 4월 16일 자 조간 1면)
매카시 비난에 오펜하이머 정직. 1954년 4월 16일자 1면.
황금성사이트 오펜하이머 관련 소식은 이후에도 계속 한국에 알려졌다.
“오펜하이머 박사를 영구 제명, 특별조사위서 주장”(4월 20일 자 1면)
“아이젠하워 대통령, 오펜하이머 박사 문제도 언급”(5월 2일 자 1면)
“오펜하이머 재기용? 미국 과학자문위 다수 지지”(1957년 12월
바다이야기2 10일 자 1면)
“아이젠하워 대통령, 오펜하이머씨 복직 부인”(1958년 1월 17일 자 1면)
1965년 8월 8일자 2면.
오펜하이머는 1960년 9월 일본을 방문했다. 자신이 개발한 원자폭탄이 처음 사용된 나라라는 점에서 관심을 끌었다.
“이 세상에서 원자탄을 처음 만든 미국의 과학자 오펜하이머가 이 세상에서 원자탄의 희생을 처음 당한 일본에 들렀다. 일본의 초청으로 삼주일 동안 머물게 된 동 박사는 “내가 일본에 온 것으로 내가 저지른 역사의 한 부분 때문에 고민하는 나의 마음에 변동이 있진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그러나 원자탄을 만든 기술적인 성공에 대해서는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1960년 9월 13일 자 석간 4면)
오펜하이머 별세. 1967년 2월 21일자 2면.
오펜하이머는 5년 후 인터뷰에서도 “원폭 외엔 대안이 없었다”고 했다. 원폭 투하로 전쟁을 일찍 끝내지 않았다면 미국과 일본은 더 큰 희생을 치렀을 것이란 주장이다.
“오펜하이머 박사는 6일로 20주년을 맞는 광도(廣島·히로시마) 원폭 투하 기념에 관련하여 CBS방송의 마틴 아그론스키 기자와 인터뷰를 하였다. 오펜하이머 박사는 당시 조지 마셜 장군과 헨리 스팀슨 육군장관으로부터 “우리가 일본 본토에 상륙하여 싸워야만 하는데, 그것은 미국인들과 일본인들의 대규모적인 살육을 의미한다”는 견해를 들었다고 밝혔다.”(1965년 8월 8일 자 조간 2면)
오펜하이머는 1967년 2월 18일 별세할 때까지 미국에서 공산주의 간첩 혐의를 벗지 못했다.
“일본 광도(広島·히로시마) 원자탄 제조자의 한 사람인 로버트 오펜하이머 박사는 한때 공산당과 접촉했다는 의심을 깨끗이 씻어버리지 못한 채 죽었다. 1954년 조셉 매카시 상원 의원이 주관한 반미활동조사위원회에서는 오펜하이머 박사가 1940년 이후 원자 간첩 로전버크 박사 부처와 친하다는 이유로 그가 간첩 활동에 관련되었으리라고 의심한 것이다. 확실한 단서는 얻지 못했으나, 그때부터 오펜하이머 박사는 원자탄 정보를 다루지 못하게 되었다.”(1967년 2월 21일 자 2면)
오펜하이머 어록. 1967년 2월 23일자 5면.
조선일보는 오펜하이머 사망 당시 그의 어록을 덧붙여 보도했다. ‘사상가 오펜하이머 어록’이란 제목을 달았다.
“〇…예술가가 고독하다는 것, 학자들이 그들 학설을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데 실망한다는 것, 과학자가 편협하다는 것은 위대한 이 역사적 변동기에 있어 부자연한 징조인 것이다.
〇…원자 속에 깃들인 창조의 신비 속에 인간이 너무 깊이 파고드는 바람에 물리적 세계의 정연한 관념에 환원할 수 없는 비극을 맛보게 되었다.
〇…우리들이 공통된 문화 생활의 향상에 공헌한다면 과학자들로 하여금 보다 정서적으로 일하게 하고, 예술가로 하여금 보다 정밀하게 일하도록 해야 한다.
〇…새로운 것은 그것이 이전에 없었기에 새로운 것이 아니라, 질적으로 변화했기에 새로운 것이다.”(1967년 2월 23일 자 5면)
오펜하이머는 사후 55년 만인 2022년 12월 간첩 혐의를 벗고 명예를 회복했다. 영화 ‘오펜하이머’ 개봉 8개월 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