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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달 21일 찾은 전남 여수국가산업단지(여수산단). 공장 지대를 따라 이어진 복잡한 배관과 설비 사이로 텅 빈 유휴 부지들이 눈에 띄었다. 설비 증설에 대비해 기업들이 마련한 부지였지만 신규 투자가 중단되며 방치된 상태였다. 공사를 위한 첫 삽도 뜨지 못한 듯, 황량한 한 유휴부지에는 포크레인 한 대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산단에서 만난 생산직 A씨(48)는 “90년대 후반 국제통화기금(IMF) 외 현대증권 환위기 때도 이 정도로 불황이 심각하지는 않았다”며 “IMF 때는 (제품을) 만들면 팔리기라도 했지, 지금은 생산해도 재고만 쌓인다”고 우려했다.
    불황의 그늘이 여수산단에 짙게 드리워졌다. 중국발 저가 공세와 글로벌 수요 위축 등이 겹치며 석유화학 업황 부진이 길어진 영향이다. 울산과 함께 국내 대표적인 석유화학 산업단지인 여수산단은 진에어 2023년 2조7080억원에 이르던 투자금액이 지난해 5172억원으로 1년새 5분의 1 수준으로 쪼그라들었다. 여수시에 따르면 올해 1분기에 여수산단에 신규 투자하기 위해 시와 투자 협약을 맺은 기업은 단 한 곳도 없었다. 시 관계자는 “업황이 나아질 기미가 안 보이니 기업들이 수년간 투자 검토만 하거나, 아예 철수해버리는 곳들이 많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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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경민 기자


    지난해 말 일부 라인 가동을 중단한 롯데케미칼 여수2공장 앞은 오가는 사람 하나 없이 적막감이 감돌았다.롯데케미칼은 최근 3공장 내 태양광 필름용 소재인 폴리올레핀 엘라스토머(POE) 라인도 ‘박스업’(장 농협캐피탈금리 기적 가동 중단) 조치를 끝냈다. LG화학은 여수 스티렌모노머(SM) 공장 가동을 중단한 상태다.
    공장이 멈추니 주변 상권과 지역 경기도 얼어붙고 있다. 여수산단 인근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장모(54)씨는 “지난해보다 올해는 사람이 더 줄었다”며 “퇴근시간대에도 손님이 없어 일찍 문을 닫고 싶은 날이 많다”고 토로했다.20년 이상 여수에서 한달이자 택시를 몰아온 김모(72)씨는 “여수산단이 호황일 때는 하루에 콜을 30건도 넘게 받았지만, 최근에는 10여 건에 그친다”고 했다.



    지난 21일 오후 여수시 국가산업단지 인근 무선지구 상가 부지 곳곳에 매매 전단이 붙어 있었다. 무선지구는 한때 여수국가산단 호황기 때 번화가로 활기를 띠었지만, 지금은 임대·매매를 알리는 건물이 즐비한 지역으로 변했다. 여수=노유림 기자


    현재 석유화학 산업은 중국의 저가 밀어내기와 중동의 석유화학 진출, 미국의 관세 전쟁 불확실성으로 인해 ‘삼중고’에 빠져 있다. 특히 제1 수출처였던 중국이 가장 위협적인 경쟁자로 돌변한 게 뼈아프다. 2020년 이후 중국이 나프타분해설비(NCC)를 대규모로 증설하면서 시장 판도가 달라졌다. 한국의 석유화학 제품 수출 대상에서 중국의 비중은 2019년 43.6%에서 지난해 36.9%로 떨어졌다.



    박경민 기자


    중동까지 석유화학 분야 투자를 확대하고 있어 범용 제품의 경쟁은 더욱 치열해진 상태다. ‘산업의 쌀’로 불리는 에틸렌 생산능력은 중국과 중동을 중심으로 2026~2028년 약 4000만톤(t)이 늘어날 전망이다. 국내에서도 사우디아라비아 아람코의 자회사인 에쓰오일이 ‘샤힌 프로젝트’를 내년 완공하면, 울산에서 연간 에틸렌 180만t이 생산될 예정이다. 기존 기업들은 과잉 생산으로 2022년 이후 에틸렌 신규 증설을 중단했는데, 원가 경쟁력이 뛰어난 정유업체가 석유화학에까지 뛰어든 것이다.
    정부는 올 상반기 중 석유화학 산업 경쟁력 제고 방안의 후속 대책을 발표할 방침이지만, 업계는 ‘알맹이 없는 맹탕이 될 것’이라고 우려한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석유화학 업체들이 자율적으로 사업재편 계획을 도출하면 정책적으로 지원하겠다는 입장인데, 업체별 이해관계가 달라 의견 취합이 쉽지 않다. 실제로 한국화학산업협회가 최근 보스턴컨설팅그룹(BCG)과 사업재편 컨설팅을 진행하며 업체들을 인터뷰 해보니, 정부 주도의 구조조정이 필요하다는 의견과 민간 자율로 해야 한다는 의견이 엇갈렸다고 한다. 협회 관계자는 “업체별로 처한 상황이 달라 생각이 다 다르지만, 협회의 기본 입장은 사업재편은 정부가 주도할 수 없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박경민 기자


    가장 첨예한 건 NCC 설비 통폐합이다. 업계 1위인 LG화학은 여수 NCC 2공장 지분 매각을 추진하는 가운데 최근엔 수처리필터 사업부 매각을 추진하며 사업 재편에 속도를 내고 있다. 그러나 상황이 더 안 좋은 NCC 업체들은 내심 정부가 ‘빅 딜’을 주도해주길 바라는 분위기도 있다. 국내에선 LG화학·롯데케미칼·여천NCC·대한유화·한화토탈에너지스·SK지오센트릭 등이 NCC를 보유하고 있다. 한 NCC 운영 업체 관계자는 “석유화학 구조조정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데, 민간에 맡겨 놓으면 이익만 챙기느라 합의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기업들이 각자 버티기에 나서면 ‘죄수의 딜레마’가 우려된다는 것이다. NCC가 없는 일부 기업은 정부 주도로 NCC를 통합했다가 원재료(에틸렌) 가격이 비싸질까 우려하는 등 업체별로 ‘동상이몽’이다.
    산업 체질을 고부가가치 제조 위주로 개선하기 위해 정부 역할이 필요하단 목소리가 크다. 삼일PwC경영연구원은 지난해 말 발간한 보고서를 통해 “NCC 설비를 통폐합해 1~2개 업체가 운영하고, 나머지는 스페셜티(고부가가치 제품) 제조업체로 특화해야 한다”라며 “기업 자율에만 맡길 경우 골든타임을 놓칠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상원 산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중국이 범용 시장을 장악하면 결국 가격을 올릴 것”이라며 “국내 석유화학 산업의 경쟁력 유지를 위해 정부 주도의 사업 재편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지난 21일 오후 여수시 국가산업단지 내 롯데케미칼3공장. 롯데케미칼은 지난해 12월 여수 2공장 생산라인 3곳의 가동을 중단한 데 이어 최근에는 3공장 내 POE 라인 잠정 가동 중단 조치를 끝냈다. 여수=노유림 기자


    익명을 요청한 업계 관계자는 “국내 석유화학 업체들은 대부분 대기업 집단 내 핵심 계열사이기 때문에, 통합 과정에서 경영권에 대한 합의가 원활하게 이뤄지기 어려울 것”이라며 “정부가 구조조정 참여 기업에 정책금융 지원 등 당근을 제시하며 참여를 유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반면 일각에서는 정부 자금이 투입되지 않은 민간 기업들이므로 정부 주도 구조조정은 신중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업계 공통의 바람도 있다. 기업들은 산업용 전기요금 감면, 공정거래법상 위기 업종의 사업재편에 따른 기업 결합은 허용하는 예외조항 신설 등을 요구하고 있다. 류성원 한국경제인협회 산업혁신팀장은 “지난해 10월 산업용 전기요금이 10.2% 인상돼 업체들의 비용 부담이 크게 늘었다”라며 “석유화학 산업은 주요 생산비 중 전력비용이 3.2%에 달해 글로벌 가격 경쟁력 저하가 우려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최선을 기자, 여수=노유림 기자 choi.suneul@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