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군 장연리 주민들이 지난해 106주년 만세운동 기념식에서 만세를 외치고 있다. 청도군 제공
영천항일독립운동 선양회가 건립한 정재호, 정원흥 애국지사 추모비. 영천시 제공
100여 년 전 뜨거웠던 만세 운동의 역사를 품고 평화롭게 흐르는 동천강의 모습. 청도군 제공
바다이야기오락실 1919년 3월 11일, 청도 지역 3·1 만세운동의 첫 불씨를 지핀 매전면 장연리 시위 관련 기록물. 청도군 제공
장연리 3.1운동 기념비.사진=청도군 제공
황금성사이트 장연리 3.1운동 기념비 뒷면 모습. 청도군 제공
1919년 봄, 전국에 울려 퍼진 만세 소리는 경북의 조용한 동네 청도와 영천까지 닿았다. 평화롭던 시골 장터와 마을은 순식간에 뜨거운 만세 운동의 현장으로 바뀌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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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주민들과 청년들은 무서운 총칼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큰 소리로 만세를 외쳤다. 이들의 용기 있는 목소리는 어두운 시대를 밝히는 독립의 불씨가 됐다. 제107주년 3·1절을 맞아, 기꺼이 시대의 거센 파도 속으로 몸을 내던졌던 청도와 영천 민중들의 의로운 발자취를 되짚어본다.
◇정적 깨운 밤 8시의 외침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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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는 매천면 장연리를 중심으로 만세운동이 전개됐다. 장연리의 거사는 1919년 3월 11일 밤 8시쯤 시작됐다. 어둠이 짙게 깔린 시간, 마을 주민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창천 주변과 마을 입구로 모여들었다.
이 거사를 주도한 인물은 김집이(金集伊)와 노이만(盧二萬) 지사였다. 이들은 평범한 농민이자 마을
바다이야기고래 구성원이었으나, 나라를 되찾겠다는 일념 하나로 죽음을 무릅쓰고 앞장섰다. 20여 명의 주민이 태극기를 흔들며 목이 터지라 외친 "대한독립만세"는 정적에 잠겼던 청도의 밤하늘을 깨웠고, 이는 곧 청도 전역으로 퍼져나갈 항일 운동의 신호탄이 됐다.
장연리는 예로부터 광주 이씨(廣州 李氏) 집성촌으로, 학문과 예절을 중시하는 선비 정신이 깊게 뿌리 내린 곳이다. 특히 마을에 위치한 이원당(李元塘)과 같은 서원과 정자는 유림의 기개를 상징하는 장소였다.
이곳의 만세 운동은 단순한 우발적 사건이 아니었다. 조상 대대로 내려온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선비의 정신'이 식민지 지배라는 현실 앞에서 폭발한 것이다. 당시 시위에 참여했던 주민들은 일제 경찰의 무자비한 탄압에도 굴하지 않았으며, 주동자인 김집이·노이만 지사는 체포 후 각각 징역 6개월의 옥고를 치르며 끝까지 민족의 자긍심을 지켜냈다.
◇90년만에 세워진 '독립운동 발상지' 기념비
장연리 만세 운동은 청도 3·1운동의 '효시'임에도 불구하고 오랜 시간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 그러다 지난 2009년, 그날의 용기를 기리기 위해 마을 입구에 '청도 3·1운동 발상지 기념비'가 건립됐다.
기념비에는 "이곳은 기미년 3월 11일 청도에서 가장 먼저 만세 운동이 일어난 곳"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동창천을 바라보며 우뚝 솟은 이 비석은 오늘날 이곳을 지나는 후손들에게 자유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살아있는 역사 교과서가 되고 있다.
◇장연리 주민들 '우리가 청도의 자부심'
장연리에서 만난 한 주민은 "우리 마을이 청도에서 제일 먼저 만세를 불렀다는 사실에 큰 자부심을 느낀다"며 "매년 3·1절이 오면 동창천을 따라 울려 퍼졌을 그날의 함성을 떠올리곤 한다"고 전했다.
청도군 관계자는 "장연리 만세 운동은 이후 매전면 전역과 운문면, 청도읍으로 번져나간 청도 항일 투쟁의 뿌리"라며 "앞으로도 장연리 만세 운동의 역사적 가치를 보존하고 선양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영천 지역 3·1운동의 시작
영천은 전국적인 만세 시위의 확산과 함께 3월 중순부터 4월 초순까지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됐다. 영천 지역 만세운동의 출발점은 당시 영천군 신녕면 화성동이었다.
신녕 공립 보통학교 교사였던 박필환은 1919년 3월 16일 밤, 졸업생과 재학생들을 모아 놓고 독립 의식을 고취하는 연설을 하였다. 이어 3월 26일에는 동료 교사 이석형 등과 함께 공개적으로 독립만세를 외쳤다.
교사와 지식인층의 용기 있는 행동은 지역 사회에 큰 자극을 줬고, 이후 일반 민중의 참여로 이어지는 불씨가 됐다.
4월 12일, 1000여 명의 장꾼들이 모여 있던 영천읍 창구동 영천공립보통학교(현 영천향교) 정문 앞에서 대규모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이 자리에서 수공업자 조병진(28)과 조재복(23)은 군중에게 독립만세를 외칠 것을 적극적으로 호소했다. 그러나 이들은 순찰 중이던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는 등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이날의 만세운동은 지역 주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독립 의지는 더욱 확산됐다. 4월 12일의 시위에 자극을 받은 김정희(24)는 다음날인 4월 13일, '대한국독립만세'라는 글귀를 자신의 피로 쓴 혈서 깃발을 제작해 1인 만세시위를 벌였다.
그는 일본 경찰에 체포돼 대구로 압송되는 와중에도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그의 행동은 개인의 저항을 넘어 민족적 자존과 독립 의지를 상징하는 사건으로 평가된다. 김정희 투사는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25년 '경북 3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됐다.
◇영천 항일 정신의 계승
영천 지역의 3·1운동은 학교 교사나 기독교인 등 지식인층이 중심이 돼 준비하고 계획했으며, 이후 농민·수공업자·부녀자 등 다양한 계층으로 빠르게 확산됐다.
영천항일독립운동선양사업회는 지역 독립운동의 역사를 기리기 위해 2000년 이후 30기에 이르는 독립유공포상자 추모비를 건립해 왔다. 이를 통해 순국선열과 애국지사의 희생을 기리고, 후세에 항일 정신과 독립 정신을 계승하는 데 힘쓰고 있다.
영천 지역의 3·1운동은 교사와 학생, 수공업자와 농민, 그리고 젊은 청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이 함께 참여한 민중 운동이었다. 이는 지역 사회가 주체가 되어 독립의지를 실천한 역사적 사례로서 큰 의미를 지닌다.
오늘날 우리는 이들의 용기와 희생을 기억하며, 자유와 독립이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님을 되새겨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