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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영미 시집
한 필의 광목은 처음부터 희고 부드럽지 않다. 물에 적시고 햇볕에 말리고 바람을 맞는 시간을 거쳐야 비로소 사람의 몸을 감싸는 천이 된다.
대구에서 활동하는 박영미 시인이 네 번째 시집 '청도장 광목 한 필'(문예미학사)을 펴냈다. 문예미학사의 '문화분권시선 22'로 출간된 이번 시집에는 1951년 경북 청도에서 태어난 시인이 자신의 삶을 이루어온 고향과 가족, 신앙, 질병과 고통의 시간을 되짚은 시편들이 담겼다.
표제작 '청도장 광목 한 필'은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기억과 정서를 압축한다.
시인의 고향 청도와 어린 시절 외할머니, 어머니와 막내 이모의 삶이 한 필의 광목 위에 포개진다. 시 속 외할머니는 청도장에서 광목 한 필을 끊어다가 시냇물에 헹구고 햇볕에 널어 말린다. 누렇고 빳빳하던 광목은 물과 햇살, 바람을 여러 차례 통과하며 서서히 부드럽고 하얀 천이 된다.
"시월이다/ 서늘한 바람 불어와/ 내려젖던 하늘 높이 들어 올린다"로 시작하는 작품에서 광목은 단순한 옷감을 넘어선다.
적시고 말리는 일을 거듭한 끝에 부드러워지는 광목은 고단한 세월을 견뎌온 가족의 생애이자 시인 자신의 삶과 겹친다. 외할머니가 공들여 마련한 천이 막내 이모가 시집갈 때 혼수이불 호청으로 쓰였다는 기억에서는 가난했던 시절의 살림과 가족을 향한 애틋한 마음이 함께 살아난다.
이번 시집의 또 다른 중심에는 가족사가 자리한다.
'아버지'에서는 6·25전쟁이 한 가족에게 남긴 상처를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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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은 자신이 태어난 1951년 아버지가 국군 제2사단 소속으로 전투 중이었고, 자신이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전사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확인한 사연을 시로 옮겼다.
아버지의 부재를 막연한 기억으로 품고 살아온 시인은 전사자 유족 찾기 과정을 통해 아버지와 자신이 아주 짧은 시간이나마 같은 세상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한 개인의 가족사가 한국전쟁이라는 거대한 현대사의 비극과 만나는 지.이다.
신앙 역시 박영미 시의 중요한 바탕이다.
박 시인은 대구에서 경북 의성군 탑리의 시골교회까지 찾아가 주일예배를 드리고 농장에서 복숭아와 자두 등 과일 농사를 지으며 기도하고 시를 써왔다. 그의 시에서 신앙은 추상적인 종교 언어에 머물기보다 농사와 가족, 이웃과 질병 등 구체적인 일상 속에 스며든다.
특히 암 투병 경험은 이번 시집에 삶과 죽음에 대한 보다 절실한 성찰을 불러들인다.
병과 고통 앞에서 흔들리는 자신을 감추지 않으면서도 그 자리에서 다시 신앙을 붙든다. "주님은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 주십니다"라고 고백하면서도 곧이어 "그런데 왜 나는 이웃과 친구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못합니까"라고 자신에게 되묻는다.
신앙을 타인에게 향한 판단이나 가르침으로 사용하기보다 먼저 자신을 돌아보는 거울로 삼는 태도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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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김용락은 해설 '고통과 기도, 그리고 시의 힘'에서 박영미의 시세계를 고향과 친족, 신앙이라는 세 축으로 읽는다. 고통스러운 순간 자신을 절대자에게 맡기며 절망을 건너려는 태도와 함께 종교적 대상을 일방적으로 찬양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기 성찰로 나아간다는 .에 주목한다.
고향과 가족을 향한 기억도 단순한 회고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들은 시인의 삶이 흔들릴 때마다 다시 돌아가 자신을 붙드는 뿌리로 작용한다.
도종환 시인은 박영미의 시를 두고 "푸르고 맑다"며 "한 편 한 편이 부드럽고 편안하다"고 평했다. 고난과 질병의 순간을 신앙으로 헤쳐가면서도 겸손함을 잃지 않는 시편들에서 "사랑의 향기, 생명의 향기"를 느낄 수 있다고 했다.
박영미 시인은 1951년 경북 청도에서 태어나 경북여고와 경북대 사범대 영어교육학과를 졸업했다. 2007년 '사람의 문학'으로 등단했으며 '징검다리', '낙타는 달리지 않는다' 등의 시집을 펴냈다. 대구 청구중학교 교사와 '매일신문' 기자를 지냈다.
2024년 '낙타는 달리지 않는다'에 이어 이번 '청도장 광목 한 필'로 네 번째 시집을 갖게 됐다.
한 필의 광목은 물과 햇빛과 바람을 견딘 뒤에야 사람의 몸을 감싸는 천이 된다. 박영미의 시 역시 전쟁과 가난, 가족의 이별과 질병을 지나온 시간 위에서 만들어졌다.
'청도장 광목 한 필'은 그렇게 오래된 광목처럼 한 시인이 살아온 시간의 주름을 펴 보인다. 그 안에 남아 있는 것은 상처만이 아니다. 끝내 놓지 않은 가족의 기억과 사랑, 그리고 삶을 다시 일으켜 세운 신앙의 온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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