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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9월 서울에 부임한 토마스 허바드 주한미대사가 이한동 국무총리실을 찾아 방명록에 서명하고 있다. 허바드 대사는 미 국무부의 동아시아 전문가로 필리핀 대사를 거쳐 한국에 부임했지만 이듬해 주한미군 장갑차에 의한 여중생 사망사건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해 반미 감정이 2002년 대선을 좌우하게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e영상역사관
<지난주 ‘스틸 美대사가 새겨야 할 허바드의 실패’에 이어서 계속됩니다>
2002년 11월 주한미군 군사법원은 효순·미선 양 사망 사건을 일으킨 미군 병사 두 명에게 잇따라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판결 직후 두 병사는 곧바로 미국으로 출국했습니다. 미국은 이를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에 따른 정상적인 사법 절차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상당수 한국 국민은 두 병사의 잇따른 무죄 판결과 출국을 미국의 ‘책임 회피’로 받아들였습니다.
더욱이 대선을 불과 한 달도 남겨 놓지 않은 시。에 문제의 판결이 나왔습니다. 좌파 진영은 이 사건을 반미 정서와 연결시키며 정치적 이슈로 적극 활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뒤늦게 정치적 수습 나선 미국
미국은 뒤늦게 정치적 수습에 나섰습니다. 토머스 허바드 주한미대사는 2002년 11월 27일 기자회견을 열어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두 여중생의 유가족과 대한민국 정부, 그리고 한국 국민에게 깊은 애도와 유감의 뜻을 전해 달라는 요청을 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아울러 같은 사고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한국 정부와 긴밀히 협력하겠다는 부시 대통령의 뜻도 함께 전달했습니다.
그러나 이날의 발표는 한국 국민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한국 사회가 기대했던 것은 주한 미대사를 통한 사과 전달이 아니라 부시 대통령이 직접 한국 국민에게 공개적으로 사과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이후 부시 대통령은 12월 13일 김대중 대통령에게 직접 전화해 두 여중생의 죽음에 대해 ‘깊은 슬픔과 유감을 표명했습니다. 이것 역시도 한국 국민을 향한 공개적인 직접 사과 형식은 아니었으며 이미 확산된 반미 여론을 되돌리기에는 늦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미국은 여중생 사망 사건에서 끝까지 법률적 절차와 외교적 관례를 중시했습니다. 반면 한국 사회는 국민 감정과 정치가 결합된 문제로 인식했습니다. 이 간극은 끝내 해소되지 않았고, 미국에 비판적인 좌파 진영이 이 공간을 지배했습니다.
2002년 미군 장갑차에 의해 희생된 효순,미선양의 영정 사진 사이로 주한미대사관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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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미대사관은 사태 발생 초기에 사과하고 재발 방지에 주력하겠다고 밝혔으나 11월 사고를 일으킨 병사가 무죄판결을 받고 출국하면서 반미감정이 분출했다./연합뉴스
“부시 대통령의 직접 사과를 강하게 요구했어야 했다”
허바드 대사에게 이 사건은 자신의 외교관 생활 중 가장 큰 아쉬움으로 남았습니다. 2004년 이임을 앞두고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그는 “2년 11개월의 재임 기간 가운데 여중생 사망 사건이 가장 힘들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미국이 이 사건을 얼마나 안타깝게 생각하는지를 한국 국민에게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을 가장 아쉽게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후회는 2009년 한미경제연구소(KEI)가 발간한 ‘대사들의 회고록(Ambassador’s Memoir)’에 상세하게 기록돼 있습니다. .
“이 사건을 처리하면서 내가 가장 후회하는 것은 사건 발생 직후 (부시) 대통령의 사과를 충분히 강력하게 요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주한미군사령관인) 라포트 장군과 저는 워싱턴 최고위층의 성명을 권고했지만, 즉시 나오지 않자 우리는 지역적으로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했다. 사건 발생 후 2주가 지나 월드컵이 끝날 때까지 대중의 분노가 미미했던 것에 처음에는 오해가 있었다.
나는 한국 기자가 워싱턴에서 백악관 대변인이나 대통령 본인의 사과를 이끌어낼 만한 질문을 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이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어쨌든 일단 여론이 들끓기 시작하자 (미국에)부정적인 반응은 엄청났다."
허바드만 이런 평가를 한 것은 아닙니다. 같은 시 기 주한미군 2사단장이었던 러셀 아너레이도 이 사건에 대한 미국의 대응에 문제가 있었다고 회고했습니다. 퇴직 후 재난(災難) 전문가로 활동 중인 그는 자신의 책 ‘생존(Survival)’에서 이 사건을 언급했습니다.
“여중생 사망 사건 발생 후 2사단의 입장 발표를 공보 담당 소령에게 맡겼는데 이 장교는 사죄하는 태도가 아니라 해명하는 자세를 보였다. 이는 결국 한국인들에게 잘못된 메시지를 주게 됐고 전국적인 시위로 이어졌다. 그때서야 내 실수를 깨달았지만 너무 늦었다.”
결국 미국은 사건 자체보다 초기 대응에서 더 큰 실패를 범했다는 。을 군과 외교 당국 모두 뒤늦게 인정한 셈입니다.
허바드가 본 2002년 대선
허바드는 회고록에서 효순·미선 사건이 대통령 선거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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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어린 소녀의 죽음과 미국의 대응에 대한 한국 국민의 분노가 노무현 후보의 대통령 당선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거의 없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노무현 후보보다 보수 진영 후보였던 이회창 후보를 더 강하게 비판했다는 。입니다.
“선거 막판 촛불 시위에 참여하고 부시 대통령의 사과와 SOFA 개정을 요구하는 청원서에 서명한 사람이 바로 노무현의 상대 후보였던 이회창이라는 사실을 아는 한국인은 거의 없다. 그는 자신의 불만을 표현하기 위해 나를 소환하는 큰 쇼(big show)를 벌였다.”
조선일보 2002년 12월7일 1면 하단에 게재된 민주당 노무현 후보의 광고. 노 후보는 당시 여중생 사망사건을 일으킨 주한미군 병사에 대한 무죄 판결로 반미 감정이 분출하자 이를 대선 홍보에 활용했다. 백지 광고 아래에는 작은 글씨로 다음과 같이 썼다. “정치인이라는 것이 지금처럼 부끄러울 때가 없습니다. 미선아, 효순아, 다음에 다시 태어나거든 마음껏 외쳐라, 대한민국! 반드시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겠습니다.”
반미 정서를 정치적으로 활용한 노무현
허바드의 분석은 당시 선거 과정에서도 그대로 확인됩니다. 대통령 선거를 열흘 앞둔 2002년 12월 7일, 민주당 노무현 후보는 전국 주요 일간지 1면에 촛불 이미지를 활용한 광고를 실었습니다.
“정치인이라는 것이 지금처럼 부끄러울 때가 없습니다. 미선아, 효순아, 다음에 다시 태어나거든 마음껏 외쳐라, 대한민국! 반드시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겠습니다.”
이는 주한 미군 장갑차 사고로 촉발된 반미 정서를 선거 메시지와 직접 연결한 대표적인 사례였습니다. 노 후보는 선거 과정에서 “미국에 가지 않겠다” “반미면 어떠냐”는 발언으로도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미셸 스틸 대사가 새겨야 교훈
2002년 허바드의 실패는 최근 새롭게 부임한 한국계 미셸 스틸 대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지난 20여 년 동안 스틸 대사를 제외한 9명의 미국대사를 지켜보며 내린 주한미국대사의 성공 조건은 네 가지입니다.
첫째는 전문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한 절제된 메시지입니다. 한미동맹, 북한, 중국 문제에 대한 원칙은 분명해야 하지만, 한국 정치에서 반미 논란으로 확산될 수 있는 표현은 각별히 신중해야 합니다. 미국의 연방 하원의원으로 발언할 때와 특명전권대사로 발언할 때의 무게는 전혀 다르다는 。을 인식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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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같이 언론과 SNS를 통해 한국 국민에게 다가가는 노력이 어느 때 보다 중요한 시기에 한미간의 민감한 현안을 평소 깊이 있게 숙지 후, 적시에 적절한 메시지를 발신해야 합니다.
둘째는 한국 사회에 대한 깊은 이해입니다. 스틸 대사는 서울에서 태어나 중앙여중에 다니다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습니다. 한국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이 지금의 한국 사회를 잘 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은 정치와 언론, 여론 형성 방식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한국은 법률적 판단보다 국민 감정이 먼저 움직이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여중생 사망 사건은 이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례였습니다.
알렉산더 버시바우 전 대사는 주러시아 대사를 거친 베테랑 외교관이었지만 2008년 미국산 쇠고기 파동 당시 ‘한국인들이 미국산 쇠고기에 관한 과학과 사실을 더 알게 되기를 바란다’고 한 발언이 ‘한국인들은 과학을 더 공부해야 한다’는 취지로 받아들여지면서 거센 반발을 샀습니다. 한국 국민이 미국 대사의 발언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중요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였습니다.
알렉산더 버시바우 주한미국 대사가 2005년 11월 연세대에서 특강을 마친 후 민주노동당 소속이라고 밝힌 학생들이 써붙인 반미 구호가 가득한 게시판 곁을 지나가고 있다./조선일보
셋째는 백악관과 직통하는 소통 능력입니다. 효순·미선 사건처럼 한미관계 전체를 흔드는 사안은 결국 미국 대통령의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필요하다면 백악관의 메시지를 신속하게 이끌어낼 수 있는 정치적 역량이 대사의 중요한 자산입니다. 스틸 대사는 남편인 숀 스틸 변호사가 캘리포니아 공화당 의장을 지냈고 오랫동안 공화당 전국위원으로 활동해온 당내 중진 인사입니다. 숀 스틸의 폭넓은 공화당 네트워크는 백악관과의 소통에 도움이 될 수 있는데, 남편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잘 활용하는게 필요해 보입니다.
넷째는 긴급 사태 발생시 위기관리 능력입니다. 북한의 도발, 심각한 반미 시위 등은 언제든지 동시 다발적으로 발생할 수 있습니다. 서울과 워싱턴 DC는 평소 14시간의 시차로 인해 중요한 사건을 제 때 처리하지 못해 일이 커지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2024년 12월 3일 윤석열 당시 대통령의 황당한 비상 계엄 당시 필립 골드버그 대사는 그 배경을 알지 못해 속수무책이었습니다. 한미 관계에 영향을 주는 사태가 발생시 독자적으로 신속하게 처리하는 역량을 갖춰야 합니다.
‘실향민의 딸로 서울에서 태어난 한국계 첫 여성 주한 미국대사’라는 상징성을 가진 스틸 대사가 역대 대사들의 성공과 실패를 교훈삼아 한미동맹을 한 단계 더 발전시킨 성공한 대사로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득한 게시판 곁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