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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2월 매달 한 차례 이틀씩 이어 걷는 도보국토종주를 시작한지 처음으로 설악산의 웅봉을 마주했다.
ⓒ (사)한국사람길
(이전 기사 : 시간이 멈춘 세상으로, 인제의 숨은 길을 걷다에서 이어집니다.)
지난 17일, 인제 시내를 통과해 합강정에 도착했다. 이곳은 국내 래프팅의 원류인 내린천과 설악산의 물을 품고 흘러온 인북천이 만나 소양강의 원류를 이루는 합수머리다. 인제 레포츠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국내에서 가장 높은 번지。프장이 설치돼 있는 바로 이곳에 합강정이 있다.
수많은 시문객들이 노래한 곳
합강정은 조선 중기인 1676년에 건립된 인제 최초의 정자다. 조선 초기의 정자 건립의 관례처럼 관이 주도하고 인제 읍민이 동원돼 세워졌다. 합강변의 뛰어난 지세와 경관을 내려다 볼 수 있는 능선에 건립됐는데, 처음엔 특별한 십자각 형태의 고품격을 지닌 5칸 정자였다. 건립 이후 관동팔경과 비견 되며 수많은 시문객들에 의해 합강정가가 지어져 그 위상을 짐작하게 한다.
▲ 인제 최초의 정자로 관동팔경과 비견되며 수많은 시문객들에 의해 합강정가가 지어졌던 합강정
ⓒ (사)한국사람길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소실된 것을 1971년 6칸의 콘크리트 2층 누각으로 신축한 것은 아쉽다. 이후 국도 확장으로 철거 복원을 반복하며 지금은 옛 원형을 찾을 수 없다. 하지만 합강정 터를 지키며 경승의 감상을 자아내고, 인제의 삶을 지탱했던 합강의 의미를 전하고 있다. 합강정 터의 의미는 이 뿐이 아니다. 합강정 옆엔 중앙단이 자리한다. 농경 사회였던 조선 시대에 중요한 제사 중 하나가 여제였다. 임금이 봉행 하던 여제부터 주현의 고을까지 여제단이 만들어져 매년 3회의 정기적 제사로 지내졌다.
공동체 지켜온 산 자와 죽은 자의 연결
당시 가뭄이나 전염병 등으로 제명에 죽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다. 죽은 자를 위로하는 것은 산 자의 의무였기에 위로 받지 못한 영혼을 위로하는 제사를 지내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었다. 그것은 동시에 국가와 지역 사회의 평안과 무사함을 기원하던 제사이기도 했다.
역병이나 가뭄이 특히 심할 때는 별도의 별여제를 시행했는데, 이를 위해 지역 대표성을 갖는 전국 4곳에 제단(강원도 인제, 경상도 상주, 충청도 공주, 전라도 광주)을 설치했다. 인제 중앙단도 강원도 지역을 대표해 동서 수령들이 모여 별여제를 드린 제단이다. 떠난 이를 기억하고, 남은 이들의 안녕을 함께 빌며 공동체를 지켜 왔던 우리 조상들의 기원이 지금도 이곳에 조용히 남아 있다.
그러고 보니 합강정 터엔 연결의 의미가 남다르게 모여 있다. 두 강이 만나 하나로 흐르는 소양강 물길 따라 경제를 일으키던 교통의 연결, 합강의 절경을 나누던 삶의 감상의 교류, 그리고 산 자와 죽은 자를 연결하던 중앙단까지 한 자리에 있다. 우리는 언제나 연결을 통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한다.
▲ 억울한 원혼들을 달래고 남은 이들의 안녕을 함께 빌며 공동체를 지켜 왔던 우리 조상들의 기원이 담긴 중앙단
ⓒ (사)한국사람길
사람길 국토종주의 의미도 연결에 있다. 빨리 직선으로 가는 도로로 걷지 않고 구비구비 돌아가는 사람길로 걷는다. 사람길은 지역과 지역,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고, 우리나라를 연결한다. 우리 땅에 스며 있는 사람들의 삶과 역사, 그리고 오래된 마음을 함께 만나는, 이 시대에 가장 요긴한 연결이 이루어진다. 강물이 소통의 길이 되어 삶을 실어 나르듯, 여제가 산 자와 죽은 자의 소통로가 되듯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연결이며, 그것을 가능케 하는 소통의 길이 사람길이다.
국경을 초월한 희생의 기억, 리빙스턴교
합강정에서 인북천 방향으로 2km 정도 걸어가면 리빙스턴교에 다다른다. 인제읍 덕산리와 합강리를 잇는 목제 난간 다리다. 다리 위엔 판초우의를 입고 총을 든, 한국전쟁 때 참전한 유엔군 병사들의 조각상이 서 있다.
한국전쟁 당시를 되돌려본다. 유엔군이 압록강까지 북진 했지만 중공군 참전 후 전세가 역전됐다. 전열을 가다듬은 유엔군의 반격이 다시 시작되면서 중공군은 1951년 5월 동부전선의 와해를 노린 총공세에 나섰다. 그 때의 전장 중 한 곳이 인제지구전투였다.
당시 아군의 화력을 지원하던 포병대대의 리빙스턴 소위가 전사한 곳에 휴전 후에 다리가 건설됐고, 사람들은 이 다리를 리빙스턴교라고 불렀다. 낯선 나라를 위해 자신의 젊음을 바친 한 청년의 이름이 다리 위에 남았다.
지금의 리빙스턴교는 다리 노후화로 원래 위치에서 200여m 상류에 재건한 다리로, 다리이기 전에 이국 땅에서 자유와 평화를 위해 싸우다 전사한 젊은이들을 기억하게 하는 소중한 기념물이다. 남의 나라를 위해 목숨까지 내어 주었던 국경을 초월한 연결의 의미가 이 다리 위에도 스며 있다. 그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가 이 평화로운 길을 걸으며 국토종주를 할 수 있다. 고귀한 영령에 감사와 위로를 전한다.
▲ 리빙스턴교 낯선 나라를 위해 자신의 젊음을 바친 한 청년의 이름이 다리 위에 남았다.
ⓒ (사)한국사람길
진정한 쉼이란 이런 것
원통을 지난 곳 북천에 이르렀다. 유난히 맑은 북천 물에 발을 담그는 순간 종일 걸으며 쌓였던 피로가 말없이 흘러내렸다. 함께 걸었던 단원들이 어느새 아이들처럼 웃으며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하천 바닥은 푹신한 흰 모래사장이었고, .。이 놓인 다슬기들과 함께 물놀이를 할 수 있는 이보다 좋은 천연 수영장이 없는 듯 했다. 시원한 물은 걷느라 지친 몸을 감싸 안았고, 잠시나마 시간도 발걸음도 멈추었다.
우리 삶에 가장 필요한 것은 마음의 쉼이다. 우리는 살아가며 쉼을 계획하지만, 진짜 쉼은 계획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아무 목적 없이 순간을 즐긴다면 시간은 정지된다. 시간의 길이는 중요하지 않다. 이렇게 쉰 단 몇 분의 시간이 오히려 마음을 가장 깊이 쉬게 했고, 그 짧은 시간이 다시 걸어갈 힘을 만들어 주었다.
▲ 청정 자연을 자랑하는 인제의 투명하고 맑은 북천에서 걷기의 피로를 말끔히 씻어냈다.
ⓒ (사)한국사람길
다시 걷기에 나서자 바람이 더 시원하게 느껴진다. 이내 국토종주길에서 처음 만나는 설악산이 웅장한 위용을 드러낸다. 지난해 2월에 시작해 매달 2일씩 걸어온 국토종주가 끝날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한 농부 아저씨가 건넨 토마토
이날의 종료。인 내설악 안의 북천을 향해 걷던 중 한계리에서 뜻밖의 일을 겪었다. 밭에서 땀 흘리며 일하시던 한 농부 아저씨가 우릴 보더니 한마디 하셨다.
"수고하시네요. 여기 토마토 들고 가세요"
배낭마다 국토종주 깃발을 꽂고 가슴엔 국토종주라고 쓰인 티를 입고 있었으니 우리를 금세 알아 보셨나보다. 애써 사양했지만 그의 따뜻한 미소에 이끌려 밭으로 들어갔다. 빨갛게 익은 토마토와 방울토마토를 따먹다가 그것도 모자라 손 한가득 담았다. 농부 아저씨가 더 거드신다.
"따서 배낭에 넣어서 가져가세요."
말씀만으로도 너무 배가 불렀다. 이미 저녁 시간이 지나 종료。 도착만을 기다리며 출출해진 때에 그 토마토는 세상 어떤 진수성찬보다 달고 맛있었다. 우리가 배를 채운 후에야 농부 아저씨가 어디까지 가느냐고 물으신다.
"해남 땅끝에서 출발해 강원도 고성 제진검문소까지 걸어갑니다."
아저씨가 놀란 표정으로 토마토를 더 가져가라고 하신다. 1년 내내 땀흘린 농사의 결과물을 대가 없이 받아먹은 마음에 부끄러움이 인다. 인사를 드리고 돌아서는 순간 아저씨는 우리가 처음에 봤던 그 모습 그대로 언제 무엇을 베풀었냐는듯 도랑에 내려가 열심히 일을 시작하신다.
국토종주를 하며 얻고 깨닫는 것은 너무나 많다. 길은 풍경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만나게 한다. 계산하지 않는 친절, 아낌없이 내어주는 마음, 처음 만난 사람에게 건네는 따뜻한 한마디, 진정한 베품은 일상에서 내색 없이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농부 아저씨가 가르쳐 주었다.
▲ 한 농부 아저씨의 베품 종료. 도착만을 기다리며 출출해진 때, 밭에서 따먹은 토마토는 세상 어떤 진수성찬보다 달고 맛있었다.
ⓒ (사)한국사람길
사람과 사랑, 삶이 길 위에서 연결되다
해가 서쪽 산너머로 기울 무렵, 우리는 예술인촌로로 한계정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내설악으로 들어섰다. 티 하나 없는 북천이 산 속 협곡을 청아하게 흐르며 감탄을 자아내는 곳에, 설악의 기암 봉우리들이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30km를 걸은 하루. 돌아보면 기억에 남는 것은 거리나 속도 같은 숫자가 아니었다.
군축령 숲길을 가르던 한줄기 바람, 산간의 작은 마을 같던 인제를 내려다보던 전망대, 두 강이 만나 하나가 되고 삶이 이어지던 합강정, 평화를 위해 희생한 한 젊은이의 이름을 기억하는 리빙스턴교, 시간을 정지시켜 준 북천의 물, 꼭꼭 숨겨둔 설악의 깊은 품, 그리고 이름도 묻지 못한 농부가 건네준 토마토 한 줌. 길은 목적지까지 이어져 있지만, 길의 의미는 늘 과정 속에 있었다.
국토를 걷는다는 것은 그 과정 속에서만 내내 흐르는 시간을 걷는 것이다. 수백 년 전 이 길을 넘던 사람들의 숨결을 만나고, 이름 없는 이들의 삶을 만나고, 오늘을 살아가는 따뜻한 사람들의 마음을 만났다. 길의 모든 과정에서 만난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이 우리를 연결 시켜 주었고 길을 훨씬 더 깊게 만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걷는다. 풍경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간을 관통하는 사람과 사랑의 삶을 만나기 위해.
분명 7월은 덥기만 한 계절이 아니다. 싱그러운 추억이 머무는 7월의 기억처럼, 올해도 그 바람을 이룬 여름날의 소중한 추억이 되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스토리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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