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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07-02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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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카오 야마토 먹튀 ㅻ 릴게임공략법 ㅻ™ 70.rpa216.top ★[김진웅 기자]
▲ 책 표지
ⓒ 문학과지성사
많은 사람들은 2012년 나온 한병철의 <피로사회>를 읽으면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착취한다는 것, 더 이상 자신을 착취하는 구조는 타인과 사회에 의해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 '좋아요'를 찬양하고 과잉 소통을 삶의 목적으로 삼는 자신에 의한 것이라는 깨달음을 상호저축은행금리비교 갖게 되었다. 나는 <피로사회>를 5회 이상 읽었지만 읽을 때마다 그의 호통에 다시 나의 삶을 바라보게 된다.
한병철은 작금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을 디지털 정보 가축이라고 거칠게 표현한 바 있다. 같은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 낯섦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소외시키는 문화, 획일성의 지옥에서 서로 비교하며 고통 받고, 소비자동향조사 고통 주는 사회. 디지털 사회에서 AI시대로 진화 중인 현재 우리는 한병철의 사유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2017년 책 <타자의 추방> 속 사유도 마찬가지다.
같은 것의 창궐이 사회체를 덮치는 병리학적 변화들을 낳는다. 박탈이나 금지가 아니라 과잉소통과 과잉소비가, 배제와 부정이 아니라 허용과 긍정이 사회체를 병 프리워크아웃자격 들게 한다(타자의 추방, 7쪽)
오늘날 같은 것의 테러는 모든 삶의 영역으로 확산된다. 우리는 세상 곳곳을 돌아다니면서도 하나의 경험도 하지 못한다. 모든 것을 인지하면서도 어떤 것도 인식하지 못한다. 정보와 데이터를 쌓으면서도 어떤 지식에도 도달하지 못한다. 체험과 흥분을 애타게 추구하면서도 언제 법률사무 나 같은 상태로 남아 있다. (중략) 타자의 부정성과 변모가 엄밀한 의미에서의 경험을 만들어낸다. 어떤 것을 경험한다는 것은 "우리를 기습하는 것, 우리를 맞히는 것, 우리를 변모시키는 것"을 말한다. 경험의 본질은 고통이다. 그러나 같은 것은 고통을 주지 않는다. 오늘날 고통은 같은 것으로 지속시키는 '좋아요'에 밀려난다(타자의 추방, 10-11쪽).
노동부 퇴직금 계산기
타자는 언제나 어디에나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는 더 이상 나와 타자의 다름으로부터, 독특함과 새로운 것으로부터 경험을 하기 포기하며 살아가는 사회체 속에 속해 있다. 우리도 이런 현상과 흐름을 조장한다. SNS 영상을 볼 때 우리는 더 이상 새로운 것을 접촉하지 못한다. 알고리즘으로 익숙한 것, 유사한 것, 관계된 것만 우리는 접근 가능하다.
그 어느 시대보다 방대한 정보와 데이터를 수집하고 처리한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지식에도 도달하지 못한다는 한병철의 지적에 반박하기 어렵다. 인지는 할지 모르지만 인식하기는 어려운 시대다. 인지는 알아 차린다는 의미다. 앞에 전자기기가 놓여 있고, 위험 물질이 깔려 있고, 나의 동료가 있다는 사실은 인지할지 모르지만 그 이상의 본질적인 의미를 깨닫는 그리고 관조하는 인식까지 나아가기 어렵다.
경험은 고통이다. 타인의 삶에 초대되거나 그리고 타문화와 관습에 노출된다는 것은 고통이다. 익숙하지 않으므로 적응해야 하고, 극복해야 한다. 때로는 이해되지 않아도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경험은 우리를 성장으로 이끈다. 하지만 같은 것을 추구하는 우리 각자 삶의 알고리즘 체계에서는 낯섦은 곧 적이 되고, 불편함이 된다.
신자유주의는 세계적 차원에서 엄청난 불의를 낳고 있다. 착취와 배제는 신자유주의를 구성하는 요소들이다. (중략) 돈은 정체성을 매개 해주는 데는 적합하지 않다. 하지만 정체성을 대체할 수는 있다. 돈은 적어도 그것을 가진 사람에게 안전하고 평안하다는 느낌을 줄 수는 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돈조차 없는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없다. 정체성도, 안전도 없다(타자의 추방, 24-25쪽).
착취와 배제야말로, 타자의 추방이다. 나 외의 것들을 착취와 배제를 하게 하는 요소는 신자유주의의 본질이다. 인간이란 어느 정도의 기준과 도덕률을 바탕으로, 서로의 존엄성을 견지한 채 해를 가하거나 목숨이 위태롭거나 경제적으로 무방비적인 상황을 서로 보완해주는 동물이라고 나는 정의한다. 동물은 그렇지 않다. 적자생존 법칙에만 의지해 살아가는 구조가 동물의 세계다. 그래서 인간 사회는 복지 제도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신자유주의는 오직 시장 법칙에만 모든 것을 맡겨야 한다. 도태된 인간의 추락과 추방은 어쩔 수 없다. 이러한 신자유주의 세계에서는 돈이 중요하다. 돈은 안정과 평안을 준다. 돈이 없는 자들은 아무것도 없는 것과 같다. 적자생존 법칙에 따라서 경제적으로 우월한 사람들은 안정과 평안을 보장받지만 신자유주의에서는 돈이 없는 도태된 사람들은 그냥 추방되어야 한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가장 고유한 존재 가능성과 고유한 자기존재를 택할 결단을 내린 현 존재는 외부가 아니라 내부를 지향한다. 이 현 존재는 내부에 중심을 지니고 있으며, 가장 고유한 존재 가능성을 강하게 지향하는 자이로컴퍼스와 유사하다. (중략) 내부 지향성은 타인과의 영구적인 비교를 필요 없게 만든다. 이에 반해 외부 지향적인 인간은 이런 비교를 강요받는다(타자의 추방, 53쪽).
한병철은 하이데거를 자주 인용하곤 한다. 이 책에서는 하이데거의 현존재 개념을 서술했다. 신자유주의 시대에서 우리가 살아남으려면 끊임 없이 남과의 비교를 통한 고통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외부 지향적 인간은 계속해서 비교를 강요받는 반면에 존재론적에 중심을 둔, 내재자에 가치를 둔 내부지향적 삶은 타인과의 영구적 비교를 필요 없게 만든다.
최근 SNS를 통한 과잉 소통과 '좋아요' 열풍, 과한 노출은 타자로 하여금 비교 의식을 갖게 하는 문제점이 지적되고 있다. 이 가운데 자랑할 것이 없는 보통의 삶을 살아가지만 지향점을 내부가 아닌 외부에 두는 사람은 타인과 비교를 통해 고통을 겪는다.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내면을 추구하지 않는 태도일 수 있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한 인간을 만난다는 것은 "하나의 수수께끼에 의해 깨어 있게 되는 것"을 말한다. 오늘날 우리는 수수께끼 혹은 비밀로서의 타자에 대한 경험을 잃어버렸다. 타자는 이제 유용성의 목적론에, 경제적 계산과 가치평가의 목적론에 완전히 예속되어 있다. 타자는 투명해진다. 타자는 경제적 객체로 강등된다. 이에 반해 수수께끼로서의 타자는 젼혀 가치평가를 할 수 없는 것이다(타자의 추방, 106쪽).
소설 <데미안>에서 주인공은 만남을 통해 알을 깨고 나온다. 이처럼 타자와의 만남은 하나의 수수께끼에 의해 깨어 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삶의 알고리즘 체계에 의해 같은 것, 유사 관심사, 유사 지향적 동류를 만나는 타자의 추방적 행태는 이런 경험을 방해한다.
만남은 여행과 같다. 새로운 음식, 새로운 문화, 낯선 시대적 상황과 관습 등에서 새로움을 경험하고, 압도된다. 반면, 동류 간 관계 맺음은 새로움도, 깨달음도, 깨어남도 없다. 낯섦은 고통이다. 경험은 고통을 수반해야 성장하지만 우리는 고통을 멀리하고, 경험도 포기한다. 그것을 부정하는 순간 한병철의 표현과 같이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서 '익사한다'. 우리 삶의 영역에서 타자는 추방된다. 결국, 이러한 타자의 추방은 내가 원하는 것, 내게만 좋은 것, 나와 유사한 것들 간의 상생에 매몰되어 테러리즘, 전쟁, 보호무역, 신자유주의, 이상동기(묻지마)범죄, 자살, 자기학대, 빈곤과 사회적 배제 등을 야기한다.
타자의 추방은 곧 나의 추방과도 같다. 나에게 나는 자기이지만 타인에게 나는 타자다. 한병철의 지적과 같이 디지털 울타리를 넘어, 낯섦을 두려워하지 말고, 나의 삶에 타자를 초대하는 환대의 시대로 나아가야 한다.
덧붙이는 글
▲ 책 표지
ⓒ 문학과지성사
많은 사람들은 2012년 나온 한병철의 <피로사회>를 읽으면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착취한다는 것, 더 이상 자신을 착취하는 구조는 타인과 사회에 의해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 '좋아요'를 찬양하고 과잉 소통을 삶의 목적으로 삼는 자신에 의한 것이라는 깨달음을 상호저축은행금리비교 갖게 되었다. 나는 <피로사회>를 5회 이상 읽었지만 읽을 때마다 그의 호통에 다시 나의 삶을 바라보게 된다.
한병철은 작금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을 디지털 정보 가축이라고 거칠게 표현한 바 있다. 같은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 낯섦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소외시키는 문화, 획일성의 지옥에서 서로 비교하며 고통 받고, 소비자동향조사 고통 주는 사회. 디지털 사회에서 AI시대로 진화 중인 현재 우리는 한병철의 사유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2017년 책 <타자의 추방> 속 사유도 마찬가지다.
같은 것의 창궐이 사회체를 덮치는 병리학적 변화들을 낳는다. 박탈이나 금지가 아니라 과잉소통과 과잉소비가, 배제와 부정이 아니라 허용과 긍정이 사회체를 병 프리워크아웃자격 들게 한다(타자의 추방, 7쪽)
오늘날 같은 것의 테러는 모든 삶의 영역으로 확산된다. 우리는 세상 곳곳을 돌아다니면서도 하나의 경험도 하지 못한다. 모든 것을 인지하면서도 어떤 것도 인식하지 못한다. 정보와 데이터를 쌓으면서도 어떤 지식에도 도달하지 못한다. 체험과 흥분을 애타게 추구하면서도 언제 법률사무 나 같은 상태로 남아 있다. (중략) 타자의 부정성과 변모가 엄밀한 의미에서의 경험을 만들어낸다. 어떤 것을 경험한다는 것은 "우리를 기습하는 것, 우리를 맞히는 것, 우리를 변모시키는 것"을 말한다. 경험의 본질은 고통이다. 그러나 같은 것은 고통을 주지 않는다. 오늘날 고통은 같은 것으로 지속시키는 '좋아요'에 밀려난다(타자의 추방, 10-11쪽).
노동부 퇴직금 계산기
타자는 언제나 어디에나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는 더 이상 나와 타자의 다름으로부터, 독특함과 새로운 것으로부터 경험을 하기 포기하며 살아가는 사회체 속에 속해 있다. 우리도 이런 현상과 흐름을 조장한다. SNS 영상을 볼 때 우리는 더 이상 새로운 것을 접촉하지 못한다. 알고리즘으로 익숙한 것, 유사한 것, 관계된 것만 우리는 접근 가능하다.
그 어느 시대보다 방대한 정보와 데이터를 수집하고 처리한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지식에도 도달하지 못한다는 한병철의 지적에 반박하기 어렵다. 인지는 할지 모르지만 인식하기는 어려운 시대다. 인지는 알아 차린다는 의미다. 앞에 전자기기가 놓여 있고, 위험 물질이 깔려 있고, 나의 동료가 있다는 사실은 인지할지 모르지만 그 이상의 본질적인 의미를 깨닫는 그리고 관조하는 인식까지 나아가기 어렵다.
경험은 고통이다. 타인의 삶에 초대되거나 그리고 타문화와 관습에 노출된다는 것은 고통이다. 익숙하지 않으므로 적응해야 하고, 극복해야 한다. 때로는 이해되지 않아도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경험은 우리를 성장으로 이끈다. 하지만 같은 것을 추구하는 우리 각자 삶의 알고리즘 체계에서는 낯섦은 곧 적이 되고, 불편함이 된다.
신자유주의는 세계적 차원에서 엄청난 불의를 낳고 있다. 착취와 배제는 신자유주의를 구성하는 요소들이다. (중략) 돈은 정체성을 매개 해주는 데는 적합하지 않다. 하지만 정체성을 대체할 수는 있다. 돈은 적어도 그것을 가진 사람에게 안전하고 평안하다는 느낌을 줄 수는 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돈조차 없는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없다. 정체성도, 안전도 없다(타자의 추방, 24-25쪽).
착취와 배제야말로, 타자의 추방이다. 나 외의 것들을 착취와 배제를 하게 하는 요소는 신자유주의의 본질이다. 인간이란 어느 정도의 기준과 도덕률을 바탕으로, 서로의 존엄성을 견지한 채 해를 가하거나 목숨이 위태롭거나 경제적으로 무방비적인 상황을 서로 보완해주는 동물이라고 나는 정의한다. 동물은 그렇지 않다. 적자생존 법칙에만 의지해 살아가는 구조가 동물의 세계다. 그래서 인간 사회는 복지 제도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신자유주의는 오직 시장 법칙에만 모든 것을 맡겨야 한다. 도태된 인간의 추락과 추방은 어쩔 수 없다. 이러한 신자유주의 세계에서는 돈이 중요하다. 돈은 안정과 평안을 준다. 돈이 없는 자들은 아무것도 없는 것과 같다. 적자생존 법칙에 따라서 경제적으로 우월한 사람들은 안정과 평안을 보장받지만 신자유주의에서는 돈이 없는 도태된 사람들은 그냥 추방되어야 한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가장 고유한 존재 가능성과 고유한 자기존재를 택할 결단을 내린 현 존재는 외부가 아니라 내부를 지향한다. 이 현 존재는 내부에 중심을 지니고 있으며, 가장 고유한 존재 가능성을 강하게 지향하는 자이로컴퍼스와 유사하다. (중략) 내부 지향성은 타인과의 영구적인 비교를 필요 없게 만든다. 이에 반해 외부 지향적인 인간은 이런 비교를 강요받는다(타자의 추방, 53쪽).
한병철은 하이데거를 자주 인용하곤 한다. 이 책에서는 하이데거의 현존재 개념을 서술했다. 신자유주의 시대에서 우리가 살아남으려면 끊임 없이 남과의 비교를 통한 고통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외부 지향적 인간은 계속해서 비교를 강요받는 반면에 존재론적에 중심을 둔, 내재자에 가치를 둔 내부지향적 삶은 타인과의 영구적 비교를 필요 없게 만든다.
최근 SNS를 통한 과잉 소통과 '좋아요' 열풍, 과한 노출은 타자로 하여금 비교 의식을 갖게 하는 문제점이 지적되고 있다. 이 가운데 자랑할 것이 없는 보통의 삶을 살아가지만 지향점을 내부가 아닌 외부에 두는 사람은 타인과 비교를 통해 고통을 겪는다.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내면을 추구하지 않는 태도일 수 있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한 인간을 만난다는 것은 "하나의 수수께끼에 의해 깨어 있게 되는 것"을 말한다. 오늘날 우리는 수수께끼 혹은 비밀로서의 타자에 대한 경험을 잃어버렸다. 타자는 이제 유용성의 목적론에, 경제적 계산과 가치평가의 목적론에 완전히 예속되어 있다. 타자는 투명해진다. 타자는 경제적 객체로 강등된다. 이에 반해 수수께끼로서의 타자는 젼혀 가치평가를 할 수 없는 것이다(타자의 추방, 106쪽).
소설 <데미안>에서 주인공은 만남을 통해 알을 깨고 나온다. 이처럼 타자와의 만남은 하나의 수수께끼에 의해 깨어 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삶의 알고리즘 체계에 의해 같은 것, 유사 관심사, 유사 지향적 동류를 만나는 타자의 추방적 행태는 이런 경험을 방해한다.
만남은 여행과 같다. 새로운 음식, 새로운 문화, 낯선 시대적 상황과 관습 등에서 새로움을 경험하고, 압도된다. 반면, 동류 간 관계 맺음은 새로움도, 깨달음도, 깨어남도 없다. 낯섦은 고통이다. 경험은 고통을 수반해야 성장하지만 우리는 고통을 멀리하고, 경험도 포기한다. 그것을 부정하는 순간 한병철의 표현과 같이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서 '익사한다'. 우리 삶의 영역에서 타자는 추방된다. 결국, 이러한 타자의 추방은 내가 원하는 것, 내게만 좋은 것, 나와 유사한 것들 간의 상생에 매몰되어 테러리즘, 전쟁, 보호무역, 신자유주의, 이상동기(묻지마)범죄, 자살, 자기학대, 빈곤과 사회적 배제 등을 야기한다.
타자의 추방은 곧 나의 추방과도 같다. 나에게 나는 자기이지만 타인에게 나는 타자다. 한병철의 지적과 같이 디지털 울타리를 넘어, 낯섦을 두려워하지 말고, 나의 삶에 타자를 초대하는 환대의 시대로 나아가야 한다.
덧붙이는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