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성 기자]
▲ 공안국 신부를 다룬 1927년 06월 19일 자 동아일보 기사의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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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은 태극기와 일제 총칼의 싸움이었지만, 프랑스혁명의 상징인 삼색기가
오션파라다이스게임 태극기 편에 서는 일도 있었다. 경기도 안성시가 편찬한 <안성시지 제6권: 인물자료집>은 "3·1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공안국 신부도 만세운동에 동참했다"라며 "야간 등불 행렬을 주도했고, 쫓기는 시민들을 성당으로 피신시켜 보호했다"라고 알려준다.
프랑스 이름이 앙투안 공베르(Antoine Gombert)인 공안국은 등불
오리지널바다이야기 뿐 아니라 삼색기도 들었다. 그가 안성의 안(安)과 프랑스(법국)의 법(法)을 조합해 만든 경기도 안성시 안법고등학교(설립 당시엔 안법학교) 홈페이지의 '학교 소개' 난에 이런 설명이 있다.
"일제 순사들에게 쫓긴 안성 사람들이 안성성당으로 몰려 들어가자, 공베르 신부님은 성당 문을 걸어 잠그고는 프랑스 국기를 들고 문 앞에 서서 맨몸으로
릴게임신천지 일본 순사들을 막았습니다. 그 덕분에 안성성당으로 피신한 사람들은 목숨을 건졌고, 이분들 중 많은 분들이 해방 조국에서 독립유공자가 되셨습니다."
국가보훈부의 <독립운동사 제2권: 삼일운동사(상)>은 안성시 3·1운동의 현장을 보여준다. 이에 따르면, 기다란 담뱃대에서 담배 끼우는 끝부분을 떼어낸 뒤 거기다가 태극기를 매달고 나오는 사람
바다이야기온라인 들도 있었다. 담배설대라고 불리는 길다란 부분을 국기 깃대로 활용했던 것이다.
"안성읍내 동리(東里) 윤순철·고성준·한국초 등이 주동이 되어 만세시위 준비를 하였다. 이들 3사람은 3월 31일부터 담배설대로 깃대를 만들어 간편한 태극기 70장을 만들었다. 이날 초저녁부터 고성준·한국초 두 사람은 안성시장에서 2백여 명을 모아 태극기를 나누
오션파라다이스사이트 어주자, 이 지방 주민들은 국기를 다시 보게 되어 감격하여 국기를 들고 열광적으로 만세시위를 일으켰다."
안성읍 3·1운동은 장터뿐 아니라 산에서도 열렸다. "안성읍 장대리에 사는 학생 주동섭과 당왕리에 사는 한삼석·권업동 등이 주동이 되어 3월 31일 오후에 동산에서 동민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불렀다"라고 위 책은 기술한다.
공안국은 야간 횃불시위를 주도했을 뿐 아니라 위와 같은 안성 시위대를 보호하는 일에도 참여했다. 시위대를 성당 안에 숨겨주는 데 그치지 않고, 성당 앞에서 청·백·홍 삼색기를 들고 일제 순사들과 대치했다. 그가 1901년에 건립한 안성성당은 시위대의 대피소였다. 이곳은 1919년판 명동성당이었다.
지역 주민들을 감동시킨 공안국의 노력
공안국은 1875년 4월 27일 프랑스 남부인 그랑 로데즈의 농촌 마을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학교 교사이고 그는 둘째아들이었다. 그를 포함해 형제가 무려 17명이었다. <안성시지>에 따르면, 일찍 죽은 여덟 명을 제외한 생존자 9명 중에서 딸 셋은 가톨릭 신앙을 지키며 동정녀로 살았고 아들 넷은 신부가 됐다. 그의 형은 인도에서 선교사로 활동했고, 동생은 그와 함께 한국 선교사가 됐다.
그는 18세 때인 1893년에 신학생이 되고 25세 때인 1900년 6월 24일 사제 서품을 받고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가 됐다. 애초의 발령지는 만주였다. 그런데 6월 20일 청나라에서 반제국주의 항쟁인 의화단운동이 일어나고 프랑스가 일본·미국·러시아·영국·독일·오스트리아·이탈리아와 함께 의화단 진압에 나서는 일이 벌어졌다. 이 때문에 목적지가 대한제국으로 바뀌었고, 그는 10월 9일 한성에 도착했다가 안성으로 가게 됐다.
부임 초기에 그는 현지 주민들과 갈등을 빚었다. 그와 주민들의 갈등이라기보다는, 제사 문제로 인한 가톨릭과 한국 사회의 갈등이었다. 이것은 결국 해결됐다. 그가 세운 안성성당과 안법학교가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가 성공한 것은 종교를 초월해 현지 주민들과 하나가 되고자 했던 그의 노력이 지역민들을 감동시켰기 때문이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로 의병투쟁이 활발해지자, 그는 한국인을 겨냥한 일본인들의 분풀이를 막는 데 주력했다. "의병 전쟁이 격화되었을 때는 주민과 일본인들 사이에 중재를 하여 큰 충돌을 피하게" 했다고 <안성시지>는 알려준다.
안법학교 설립으로도 증명되듯이, 그는 교육사업에도 기여했다. 대한제국 멸망 전년도인 1909년 1월 15일 이 학교의 설립인가를 마쳤고, 1912년 3월에는 안법학교에 여자부를 신설했다. 여성이 공부할 기회가 아직은 부족했던 시절에 이런 방면으로도 한국 사회에 보탬이 됐던 것이다.
공안국은 성당 건물을 학교 교육 목적으로 사용하는 이외에는 가톨릭 조직의 재정 지원에 의존하지 않았다. 학교에 돈이 부족하면 그 자신이 직접 해결했다. 그에 관한 취재 기사인 1927년 6월 19일자 <동아일보> 3면은 "공안국 씨가 학교 경비를 자담"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처음에는 신부 월급이 학교 경비로 충당됐다. 그것만으로 힘든 단계가 되자, 그는 지역 유지들의 후원금을 끌어들였다. 그것으로도 안 되는 상황이 되자, 이번에는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 1926년 3월, 그는 고국으로 돌아가 1년간 기부금을 모집 활동을 펼쳤다.
그의 교육사업에서 나타난 특징은 철저한 '한국식 교육'이다. 안법학교를 미션스쿨로 운영하지 않고 일반 학교로 만들었던 것이다. 위 기사는 "일반 학생에게 종교과목은 하나도 가르치지 안코 순조선식으로 교육을 하여 왔다더라"라고 말한다. 성당 건물을 사용하는 이외에는 가톨릭의 재정 지원에 의존하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한국을 위해 일생을 바친 프랑스 신부
▲ 2000년 9월 1일 경기도 안성지역 포도 전래 100주년을 기념하는 축제가 경기도 안성시민회관에서 열려 시민들이 전시된 각종 우수 포도 품종들을 살펴보고 있는 모습.
ⓒ 연합뉴스
공안국은 항일운동과 교육사업뿐 아니라 지역 먹거리를 만드는 데도 기여했다. 문익점이 목화씨를 이 땅에 퍼트렸다면, 그는 포도씨를 이 땅에 퍼트렸다.
1989년 당시의 안성군이 발간한 <제29회 통계연보>는 "일찌기 안성장(場)과 유기그릇으로 그 이름을 떨친 안성이 이제는 포도로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지고 있다"라고 한 뒤 "안성 지역에서의 포도 재배는 80여 년 전 안성 천주교 초대 신부 공안국의 성당에 심은 것이 시작"이었다고 알려준다.
한국 사회에 대한 공안국의 기여는 이 외에도 한둘이 아니다. 1932년 10월 4일 자 <동아일보> 3면은 57세 된 그가 경성천주교신학교 교수로 발령을 받았다면서 30년 넘게 이어진 그의 선행을 요약했다. 전투 때문에 집이 불탔거나 총알을 맞아 사상당한 사람들, 홀아비·과부·고아·독거노인(환과고독)인 사람들, 돈이 없는 환자들에게 베푼 그의 선행이 이렇게 소개됐다.
"병화(兵火)에 주택을 소실한 동포를 위하야 안주의 지(地)을 주선하얏스며, 총화(銃火)에 사상한 자를 위하야 구호의 노(勞)를 앗기지 안엇다 한다. 그박게 환과고독을 구제한 자와 빈궁한 병자를 치료한 자가 실로 그 수를 계산할 수 업시 만타 하며"
한국에 선교하러 왔다가 선교 이상의 사명을 수행한 공안국은 이 땅에서 벌어진 비극의 와중에 임종을 맞았다. 한국전쟁 발발 당시에 서울에 있었던 그가 피난을 떠나지 않은 결과다. 그는 1950년 7월 15일에 마지막 미사를 거행한 뒤 인민군에 연행됐다. 그와 동생 줄리앙을 포함한 외국인 성직자 약 40명이 이때 체포됐다. <안성시지>는 그의 최후를 이렇게 묘사한다.
"이들은 평양을 거쳐 250km나 되는 고산지 수용소로 미군 포로와 함께 보내졌다. 고산지 수용소로 가는 길은 죽음의 길이었다. 신부들과 수녀들이 하나둘씩 쓰러졌다. 11월 12일 공안국 신부도 중강진의 혹심한 추위를 견디지 못한 채 기절하고 다시는 의식을 되찾지 못했다."
동생 줄리앙은 다음날 임종했다. 1900년에 한국을 함께 방문한 공베르 형제가 50년 뒤 하루 차이로 한국 땅에서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공안국은 선교사로 불리지만, 그의 발자취는 선교사를 뛰어넘는다. 그는 교육·복지·산업과 항일투쟁에도 기여했다. 프랑스 국적자였지만, 그의 일생은 국적을 뛰어넘었다. 그의 나라는 제국주의 국가였지만, 그는 제국주의의 핍박을 받는 한국을 위해 일생을 바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