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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5월쯤 코로나 백신 받을 듯…남북·북미대화, 5월부터 가능?
작성자 주언서 조회 60회 작성일 21-03-13 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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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신 받아도 충분한 양이 아니기에 '전면개방' 어려울 수도바이든 대북정책 수립 윤곽 드러날 때 北움직임 기대(평양 노동신문=뉴스1) = 김정은 북한 노동당 총비서. [국내에서만 사용가능. 재배포 금지. DB 금지. For Use Only in the Republic of Korea. Redistribution Prohibited] rodongphoto@news1.kr(서울=뉴스1) 최소망 기자 = 북한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을 공급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이는 오는 5월쯤 남북 또는 북미 간 대면 접촉의 길이 열릴지 주목된다.국제 백신공급 프로젝트인 '코백스 퍼실리티'는 올해 5월까지 영국 아스트라제네카 (AZ)가 개발한 코로나19 백신 약 170만여회분을 공급할 예정이다.앞서 지날달 북한은 개발도상국 등 저소득국가에 코로나19 백신을 공급하기 위한 국제기금 '코백스(COVAX) 선구매 공약 매커니즘(AMC)'의 92개 지원 대상국 가운데 하나로 선정돼 이르면 올 상반기 중 백신을 공급받기로 했다.이를 위해 유니세프(UNICEF·유엔아동기금)·세계보건기구(WHO)와 코로나19 백신 공급·접종 등에 관한 협의를 진행 중이라는 외신 보도까지 나왔다.하지만 북한은 코로나19가 확산된 지난해 1월 육상과 해상 등의 국경을 모두 봉쇄하고 외부와의 접촉을 전면 차단한 이후 봉쇄를 풀지않고 있다. 이에 코로나19 백신 전달도 용이하지 않은 상황이다.코로나19 확산이 1년 이상 장기화되면서 우리 민간단체나 국제기구 등의 대북 인도적 지원은 물론 북측 내 있는 해외공관·외교관도 철수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남북은 물론 북한과 다른 나라와의 관계 역시 접촉이 어려워진 셈이다. 이러한 북한의 '고립' 상황이 AZ 백신이 북측에 도달하고 접종이 시작되면 변화가 생길지 주목된다. 5월 백신접종 이후 '면역 자신감'을 갖고 다른 나라와의 대면 접촉에 나설지, 특히 경색된 남북 또는 북미관계가 풀릴 수 있는 접촉이 이뤄질지에 관심이 쏠린다.일각에서는 북한이 백신을 공급 받은 후 코로나19 방역 또는 집단면역에 자신감이 생기면 그때 접촉에 나설 수 있다는 분석을 제기한다.(평양 노동신문=뉴스1) = 진은 북한 묘향산각에서의 방역 모습. [국내에서만 사용가능. 재배포 금지. DB 금지. For Use Only in the Republic of Korea. Redistribution Prohibited] rodongphoto@news1.kr정세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은 지난 3일 서울 여의도 이룸센터에서 열린 '다시 평화의 봄, 새로운 한반도의 길' 토론회에서 "북한은 어느 정도 면역이 생겼다 싶으면 남북접촉에 나올 것"이라면서 "계속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그런 점에서 5월이 지나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말했다.다만 백신이 공급된 순간부터 북한이 국경을 전면적으로 개방하기보다 순차적으로, 단계적으로 제한적인 수준에서의 국경 봉쇄 완화 또는 교류 협력 개방을 진행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특히 5월까지 북측에 도달할 백신의 물량으로 접종받을 수 있는 사람 수는 85만2000명 수준이다. 그러나 북한의 인구는 추산 2500만 명이 넘어 이번에 백신을 지원 받는다고 해도 주민이 모두 백신의 혜택을 누리기엔 턱없이 부족한 셈이다. 이 때문에 북한이 본격적으로 북미 및 남북 대화에 나서려면 좀 더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관측도 제기된다.김용현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는 "만약 북한이 5월쯤 백신을 도입한다고 해도 그때부터 완전하게 국경을 개방하고 대면 접촉에 나온다기보다 제한적 수준에서의 경제 교류나 대외관계를 우선적으로 모색할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북한이 현재 대외 무대에 나오지 않고 있는 이유는 코로나19라는 물리적인 이유가 있기도 하지만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가 현재 대북정책을 수립하는 중이어서 섣불리 움직임을 취하지 않겠다는 의도도 있다.오는 5월쯤에는 바이든 행정부의 대북정책이 어느 정도 마무리 될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이 나오는 만큼 또 다른 이유에서 5월은 한반도 정세가 주목받는 시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앞서 로이터통신은 바이든 행정부가 다음 달 정도까지 대북정책 검토를 완료할 예정이라고 고위 당국자를 인용해 보도한 바 있다. 다만 미국 정부는 공식적으로 언제까지 완료하겠다고 밝히지는 않았다.북한은 미국 신행정부의 대북정책이 수립된 뒤 분위기를 살피며 국제 무대의 대화 테이블로 나오는 셈범을 구상하고 있을 수도 있다. 북한은 현재 내부 경제에 집중하며 대남 또는 대미 관계에 있어서는 관망세를 유지하고 있지만 5월부터는 미국의 대북정책을 살핀 뒤 유연성 있는 움직임을 할 가능성이 있는 셈이다.김용현 교수는 "5~6월 정도면 미국 대북정책이 수립될 가능성이 있다"면서 "현재 북한이 관망세를 유지하고 있지만, 미국의 대북정책이 수립되면 북측은 전혀 움직임이 없는 지금보다는 어느 정도 (미 대북정책에 맞게)유연성을 발휘하면서 움직임을 모색해 나갈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News1 이지원 디자이너somangchoi@news1.kr▶ 네이버 메인에서 [뉴스1] 구독하기!▶뉴스1&BBC 한글 뉴스 ▶터닝포인트 2021 © 뉴스1코리아(news1.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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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겠지만 아달베롱이 언급한 세 부류의 사람은 성직자, 기사, 농민이다.중세는 그리스도교의 영향력이 역사 이래 가장 컸던 시기다. 인용한 시에서 기사나 농민보다 성직자가 가장 먼저 언급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성직자는 기사이기도 했던 왕과 영주의 보호를 받았지만, 때로는 그들과 권력 다툼도 벌인 특별한 계층이다.일하는 사람은 기도하는 사람을 위해 십일조를 바치고 부역을 해야 했다. 물론 그들은 싸우는 사람을 위해서도 일해야 했으며 세금을 바쳐야 했다. 내세의 천국을 위해, 현세의 안전을 위해서 말이다. 세 부류의 사람 가운데 ‘기도하는 사람’이 중세 초기 와인의 역사에 중요한 한 장면으로 등장한다. 이들은 두 부류가 있다. 교계에 속한 성직자와, 수도회에 속한 수도원장과 수도자(수사와 수녀)이다.이들 기도하는 사람들, 즉 성직자와 수도자가 중세 초기 와인의 명맥을 유지하고 발전시켰다. 당시 교회와 수도원은 왕과 영주들 못지않은 대토지를 소유했는데, 그곳에서 포도나무를 재배하고 와인을 생산했다.중세 초기의 유럽은 혼란 그 자체였다. 그리스도교가 공인된 이후 특혜를 받아 교회의 힘이 세진 것도 잠시, 서로마제국의 멸망과 함께 교회 역시 혼란에 휩싸였다. 농민들은 생존을 위해 영주의 보호 아래 들어가 장원에서 생활했다. 교회 역시 패권을 잡은 프랑크 왕국의 클로비스 1세에게 세례를 주고, 페피누스 3세의 쿠데타를 용인했으며, 카롤루스 대제에게 서로마제국 황제의 관을 씌워주는 등 권력자들과 결탁해 그들의 안전망으로 들어갔다. 그 대가로 교회는 농민들에게 합법적으로 십일조를 걷었고, 농민들을 부역에 동원할 수 있었다.교회가 권력자들과 손을 잡자 교회에 토지를 하사하거나 기부하는 이들이 줄을 이었다. 교회는 점점 부유해졌다. 그런데 낙타가 바늘 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이 더 어렵다고 하지 않았던가. 교회는 어느새 세속화됐다. 어느 단체나 ‘지분’이 많은 사람의 목소리가 크듯 왕과 영주는 교회의 재산에 간여했고 자신들의 측근을 주교로 임명했다. 이런 주교들은 세속인과 똑같이 결혼해 자식을 낳고, 자식에게 재산은 물론 성직까지 상속했다. 성직을 사고파는 것도 예사였다.술에 취해 쓰러진 수도사. 게티이미지뱅크당시에는 교회 소유의 땅뿐만이 아니라 주교들이 사적으로 소유한 땅도 많았다. 특히 주교들은 포도밭을 많이 소유했다. 6세기 낭트의 펠릭스 주교는 루아르 인근에 포도밭이 있었다. 다른 주교들 역시 자신들이 소유한 포도밭 근처로 거처를 옮길 정도였다. 오늘날까지도 포도밭으로 유명한 낭트, 투르, 오를레앙, 랭스, 카오르, 랑그르, 메츠, 트리어 등지가 당시 주교들이 거처하던 곳들이다. 주교들이 포도밭을 늘린 가장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와인이 성찬례와 같은 예배 의식에 꼭 필요해서였을까. 주교들 말고도 중세 와인 발전의 또 다른 축을 담당한 이들이 수도원 수도자들이다. 이들은 신앙생활에 전념하기 위해 외딴곳에 수도원을 지어 공동생활을 하며 베네딕토 규칙서를 지키며 살았다. 청빈, 정주, 복종을 맹세한 이들은 매일 정해진 시간 동안 기도하고 노동했다. 자급자족하기 위해 필요한 물품을 스스로 만들어 사용하다 보니, 이들은 자연스럽게 학자, 농부, 양조가, 수공예 장인, 약사, 의사이기도 했다. 또한 수도자들은 당시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지식인인 터라, 이들 덕분에 사라져버릴 수도 있었던 고전들이 보존되었고 농업과 와인 양조법 등 각종 기술이 발전할 수 있었다.한편 수도자들은 땀 흘려 황무지를 개간해 농사를 지었다. 특히 와인을 만드는 일은 성경을 필사하는 것만큼이나 영성을 키우는 숭고한 일로 여겼다. 와인은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하기에 그 의미가 특별했기 때문이다.포도나무 재배법을 연구하고 있는 시토 수도원의 수도사들. 위키미디어수도자들은 포도나무 가지치기를 실험하는 등 과학적으로 포도 농사를 지었다. 와인을 만드는 과정에서 레드와인엔 달걀흰자를, 화이트와인에는 물고기 부레를 사용하면 와인을 맑게 할 수 있다는 사실도 터득했다. 또한 맛이 변한 와인은 식초로, 등외품 포도로는 햄이나 치즈를 절일 때 활용했고 포도씨 기름으로는 비누나 향신료를 만들었다. 이 모든 노하우를 이들은 소작인들에게 전수했다.이처럼 소임을 다하는 영성 가득한 수도자들이 있지만, 대부분의 수도원장은 당시 주교들과 마찬가지로 영주와 이해관계에 얽힌 이가 임명되면서 성 문제나 재산 문제가 불거졌다. 이때 개혁을 부르짖으며 생겨난 곳이 클뤼니 수도원이다.910년경에 기욤 1세(아키텐 공작이자 마콩 백작)가 프랑스 부르고뉴 클뤼니에 땅을 기증하여 수도원을 세웠다. 이들은 초기의 베네딕토 규칙서를 지키면서 수도원뿐만 아니라 교회도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성직자들은 결혼도 세습도 성직 매매도 하지 말라. 수도원도 영주의 봉토를 받아선 안 되며, 영주 역시 수도원에 간여하지 말라. 수도원장은 수도자들의 회의에서 선출한다.”클뤼니 수도원은 영주의 봉토를 받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기증한 재산은 받았다. 당시 영주들 사이에서는 수도원에 땅을 기증하거나 유산을 남기면서 노후를 의탁하는 것이 유행했다. 점차 수도원이 많은 땅을 소유하게 되자 수도자들은 더는 노동을 하지 않았다. 수도원의 소작인들이 수도자들이 먹고 마실 음식과 와인을 책임졌다. 결국 클뤼니 수도원 역시 개혁의 대상으로 변질했다. 910년께 프랑스 부르고뉴 클뤼니에 세워진 클뤼니 수도원은 교회의 개혁운동을 이끌었다. 위키미디어또다시 울려 퍼지는 개혁의 외침 속에 1098년 부르고뉴에 시토 수도원이 설립됐다. 이들은 자급자족을 위해 직접 노동하면서 포도나무 재배법 등 여러 농사법과 와인 양조법을 발전시켰고, 농민들에게 이를 전수했다. 부르고뉴의 클로 드 부조와 독일 라인가우의 하텐하임과 자알레운스트루트, 오스트리아 니더외스터라이히의 캄프탈에서 생산하는 와인은 시토 수도회에서 개척한 대표적인 와인이다. 안타깝게도 시토 수도회 역시 나중에는 개혁의 대상이 될 정도로 타락하게 되지만 말이다.그런데 교회나 수도원이 이토록 포도밭을 넓혀 와인을 만들어낸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와인이 성찬례에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보면 실상은 다르다. 중세에는 일반 신자들이 미사에 참여하더라도 영성체(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 빵과 포도주를 받아먹는 일)를 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영성체를 한다 해도 사제만 빵과 와인을 먹고 일반 신도들은 빵만 받아먹었다. 이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종교적 목적에 필요한 와인은 극히 소량이었으리라.부르고뉴 그랑크뤼 와인 ‘클로 드 부조’를 생산하는 포도밭. 시토 수도회에서 만든 대표적 와인이다. 위키미디어오히려 와인은 세속적으로 더 많이 필요했다. 교계 고위급 인사들과 교회에 영향력이 큰 관계자들은 종교적 이유와는 상관없이 매일 와인을 마셨다. 연회도 자주 열었으니, 이 자리에 와인은 필수였다. 당시 기록을 보면, 와인을 마시고 주사를 부리는 성직자들 모습이 숱하게 등장한다. 한 주교는 매일 와인을 마시고 취해서 장정 4명이 들어서 옮겨야 했다. 또 어떤 주교는 알코올에 중독되어 가두어야 할 정도였다. 와인이 없다며 기물을 부수고 행패를 부리는 주교도 있었다.성직자라는 주교들이 이 지경인 걸 보면, 마인츠의 지크프리트 대주교의 일화가 이해될 정도다. 그는 자신의 포도밭과 거처가 있는 뤼데스하임 근처의 농부들이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간청했지만 이를 거절했다고 한다. 그에게 그 황무지는 장차 와인을 공급할 포도밭이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중세 초기 와인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종교적 목적 외에도 세속적 생활에 빠진 이런 주교들 ‘덕분’이기도 했다.수도원장의 ‘공’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 역시 주교들 못지않았다. 매일 와인을 마시며 연회를 열었다. 수도원장들은 서로 와인을 교환하면서 자기 수도원 와인이 품질이 좋다며 뽐내기도 했다. 이들이 즐긴 ‘뱅 도뇌르’라는 칵테일 파티는 모습은 달라졌지만, 오늘날까지 내려올 정도다.수도자들에게도 와인이 필요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가족과 떨어져 외딴곳에서 규칙적인 수도 생활을 해야 하는 이들에게 와인은 삶의 윤활유이자 숨통이었을 것이다. 당시 수도회, 특히 베네딕토 수도회는 수도자들에게 매일 일정량의 와인을 마실 수 있도록 원칙을 정했다.“와인은 수도자들과는 맞지 않는다. 허나 모두가 와인을 마시기를 원하니 하루 1헤르미나(약 0.23리터)씩의 와인을 허용한다. 특별히 몸이 아픈 수도자에게는 수도원장의 재량으로 더 많은 와인을 제공할 수 있다.”한편 와인은 수도원 살림에도 필요했다. 수도원은 세금을 면제받기는 했지만, 자급자족하려면 여분의 와인을 내다 팔아야 했다. 당시에는 와인이 현금화할 수 있는 가장 편한 농산물이었다. 수도원은 포도밭 소작인들에게 소작료와 세금뿐 아니라 십일조를 와인으로 받기를 원했다. 수도원이 소작인들에게 포도 재배법을 가르치고 와인 생산을 권장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수도원을 방문하는 손님은 으레 와인 대접을 받았다. 당시에는 순례자 대부분이 수도원에 머물렀으니, 성지 순례가 유행하면서부터는 와인도 많이 필요했으리라. 사실 순례자가 많이 찾아오면 수도원과 교회는 물론, 마을 전체가 부유해질 수 있었다. 순례자가 좋아할 만한 성 유물을 훔쳐 오기도 했을 정도였다고 하니 순례자를 유치하기 위해서라도 수도원은 좋은 와인을 만들려고 애쓸 수밖에 없었다.이렇듯 중세의 교회와 수도원은 ‘본의 아니게’ 와인의 명맥을 지켜 후대에 물려주었다. 교회와 수도원이 생기는 곳에는 어김없이 포도밭이 생겼고 와인을 생산했으니 말이다. 물론 당시 영주들 역시 교회와 수도원 못지않게 포도밭을 경영하며 와인을 생산했다.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당시 ‘나그네’들은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을 보며 가슴이 애달프기는 했을까? 교회와 수도원의 포도밭 위로 타는 저녁놀이 허리가 휘도록 ‘일하는 사람’의 속처럼 붉었을 테니 말이다.시대의창 대표ㆍ와인 어드바이저▶[디어마더] 엄마의 삶을 인터뷰하고 책에 담으세요▶[제로웨이스트] 재활용 막는 일회용 컵 '잉크 로고' ▶한국일보닷컴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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