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유 오늘의 운세] 96년생 알지 못하는 것에 배움을 찾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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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녹유(錄喩)의 '오늘의 운세' 2020년 12월 28일 월요일(음력 11월 14일 을사) 녹유 02-747-3415. 010-9133-4346 ▶ 쥐띠 48년생 쓸쓸한 마무리 한숨이 길어진다.60년생 먼 길 온 친구 반가움이 배가 된다.72년생 기울었던 살림이 중심을 잡아간다.84년생 어려움을 이겨낸 성공을 볼 수 있다.96년생 알지 못하는 것에 배움을 찾아가자. ▶ 소띠 49년생 약해지지 않는 단단함을 더해보자.61년생 뜨거웠던 기대는 차갑게 식어간다.73년생 간섭이 아닌 응원군이 되어주자.85년생 설득력 없는 대화 미움만 남겨진다.97년생 땀이 만든 결실 자랑이 남겨진다. ▶ 범띠 50년생 과거의 화려함을 되찾아올 수 있다.62년생 축하세례의 주인공이 되어보자.74년생 자존심이 아닌 실리를 택해보자.86년생 기분 좋은 승리 부러움을 받아낸다.98년생 사서 하는 고생 눈도장을 찍어낸다. ▶ 토끼띠 51년생 웃을 수 없는 일에 시간을 아껴내자.63년생 보고 싶던 얼굴 그리움을 풀어내자.75년생 쉬어가는 여유 일상에서 멀어지자.87년생 때가 아니다. 궁금함을 참아내자.99년생 주고받는 것은 정으로 해야 한다. ▶ 용띠 52년생 옛날 맛이 나는 대접을 받아보자.64년생 편안해 있는 것에 긴장을 조여내자.76년생 아픔이 많았던 부진에서 깨어난다.88년생 잘하려 하지 말자. 기초를 다시 하자.00년생 말이 가벼우면 화살이 되어온다. ▶ 뱀띠 41년생 가르치고 배우고 머리를 맞대보자.53년생 아쉬운 실패 뒷모습이 쓸쓸해진다.65년생 금쪽같은 기회 날개가 달려진다.77년생 피하고 싶어도 정면승부 해보자.89년생 별 중에 별이 되는 자리에 설 수 있다. ▶ 말띠 42년생 따가운 시선에도 자유를 가져보자.54년생 뒤돌아보지 않는 앞만 보고 가자.66년생 근심걱정 없는 평화가 함께 한다.78년생 곱고 예쁜 말로 빚진 것을 갚아내자.90년생 어둠은 사라지고 희망이 보여 진다. ▶ 양띠 43년생 공평하게 나누는 지혜를 가져보자.55년생 미루고 있던 것에 마무리를 해내자.67년생 힘겨운 세상살이 주름이 깊어진다.79년생 잘 익은 솜씨 부러움을 받아낸다.91년생 땀으로 얻은 것이 보석이 되어간다. ▶ 원숭이띠 44년생 보물창고 지갑 사치를 누려보자.56년생 다르지 않다는 동질감을 가져보자.68년생 있는 듯 없는 듯 구석을 지켜내자.80년생 책임 없는 약속 외톨이가 될 수 있다.92년생 아이가 아니다. 어른 노릇 해야 한다. ▶ 닭띠 45년생 마음이 시려져도 애써 외면하자.57년생 웃음꽃이 활짝 잔치를 가져보자.69년생 일희일비 없이 뿌리를 단단히 하자.81년생 정성들인 기도가 하늘에 전해진다.93년생 의지가 어렵다 홀로서기를 해보자. ▶ 개)띠 46년생 초라함을 감추는 포장을 입혀보자.58년생 뿌듯하고 풍성한 행복이 함께 한다.70년생 구관이 명관 부족함을 채워보자.82년생 춥지 않은 따뜻한 밤을 가져보자.94년생 틀리지 않은 것에 믿음을 지켜내자. ▶ 돼지띠 47년생 경험으로 얻어낸 실력을 펼쳐내자.59년생 얼굴 가득 흡족한 미소가 그려진다.71년생 소리 소문 없이 행운이 다가선다.83년생 반가운 제안도 저울질을 더해보자.95년생 달콤한 여유 두 다리를 뻗어보자. ▶ 네이버에서 뉴시스 구독하기 ▶ K-Artpark, 미술품 구매의 즐거운 시작 ▶ 뉴시스 빅데이터 MSI 주가시세표 바로가기 <ⓒ 공감언론 뉴시스통신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다른 생각했던 돌아서자 온라인 바다이야기사이트 저 리츠.”“인정……? 넘긴 때는 다시 신의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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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툭툭 던지는 사설마저 가락이 되는, 종이섬 지도(紙島)] 외국 사람인데 한국말을 하네 통영시 용남면 원평 포구, 칼날 같은 추위가 귀를 끊어놓을 듯 매섭습니다. 지도로 가는 배를 기다리는 중입니다. 통영 시내 마실 나갔던 할머니들이 시내버스에서 내립니다. 대합실 안으로 들어온 할머니 한 분 대뜸 나그네에게 말을 겁니다. “어디서 왔소?” “멀리서 왔습니다.” “겉 보니 외국 사람인데 말은 한국말을 하네.” 턱수염에 배낭을 맨 때문인지 나그네는 섬을 돌다가 자주 외국인으로 오해받습니다. 주로 아이들과 노인들이 아주 외국인으로 단정을 하고 말을 겁니다. 아이들은 “헬로”하며 손을 흔들고 노인들은 대뜸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묻기 일쑤입니다. “한국에 온지 오래 됐는가 보네. 한국말을 잘 하이.” “예, 몇 십 년 됐습니다.” “그라이 그라고 한국말을 잘 하제. 어느 나라서 왔소.” “하늘나라서 왔습니다.” “무슨, 하늘나라가 어딨다꼬.” 슬쩍 장난으로 대답했는데 할머니는 나그네를 여전히 외국인으로 생각하는 눈치입니다. 할머니가 잠시 대합실 밖으로 나갔다가 오십니다. “추운데 어딜 다녀오세요?” “담배 묵고 옵니다.” “여기서 드시지요.” “그람 당신이 좋아 하우까? 누도 담배는 안 좋다 하우다. 술 한 병 사서 갈라 묵고, 담배도 묵고.” “술도 드셨어요?” “한 병 가 다섯이서 갈라 묵으니 묵을 게 없다.” 할머니는 반찬거리도 살 겸 통영 시내 나갔다 오는 중입니다. “천 원 가 떡 사면 멫이나 묵나. 술 한 병 천삼백 원이면 다섯이 여섯이 갈라 묵는디.” 추위를 이기기 위해 할머니는 소주 한 병을 사서 마을 사람들과 나눠드셨습니다. “그래도 한 잔 묵었다고 기분이 좋고, 좋데이.” “통영에 자주 나가세요?” “늙은 게 할 일 있나. 그라이 통영 가지. 통영 가야 술도 사 묵고 담배도 묵고.” 지금이야 날이 추워서 내갈 것이 없지만 할머니는 통영 장날이면 손에 잡히는 것 무엇이나 싸들고 장으로 갑니다. 호박잎도 따가고, 진달래꽃도 따가고, 굴도 까가고 뭐든 들고 장으로 갑니다. 꼭 팔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장에 갈 핑계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장날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도 나누고 술도 한 잔 사 먹는 것이 더할 수 없는 즐거움입니다. 할머니가 나그네의 얼굴을 물끄러미 처다 보더니 한마디 하십니다. “총각인가, 아저씬가. 내가 관상을 보니 염만 밀면 미남인데 왜 그라고 다니나 영감 멘키로.” 할머니는 나그네의 수염이 영 거슬리는 모양이다. 그래도 이내 수염을 인정해 줍니다. “유행 따라 사는 것도 제멋이라.” ▲거망마을 공동체 밥상Ⓒ섬학교 어디서 이런 아저씰 사겨서 왔노 지도에서 도선이 건너 왔습니다. 차를 싣고 다니는 도선이 수리를 들어가 임시로 작은 나룻배가 다닙니다. 섬까지는 채 10분이 걸리지 않습니다. 할머니는 거망마을에 삽니다. 할머니를 따라 가겠다 하니 어서 가자고 반기십니다. 할머니의 집은 마을회관 바로 옆. 마을회관은 동네 할머니들이 모여서 노는 사랑방입니다. 보일러가 고장 나 다들 전기장판 위에 이불을 덮고 앉아 두런거립니다. 나그네가 회관으로 들어서니 할머니들이 반기면서 어서 손을 녹이라 이끕니다. “뭘 볼끼 있다고 하필 이 칩운데 왔노.” 배에서 만난 할머니가 뒤따라 들어오니 할머니들이 농을 칩니다. “어디서 이런 아저씰를 사겨서 왔노. 재주도 좋다.” “사길라면 이런 사람 사겨야지.” 할머니들의 우스갯소리로 썰렁한 방안 공기가 훈훈해집니다. 배에서 만난 분은 김영이 할머니. 신명이 많으십니다. 할머니는 내내 수염이 신경 쓰이는 모양입니다. “염만 안 길렀으면 일등 신랑감인디 염 길러가 영 베렸다.” 할머니들이 점심상을 차리셨습니다. 생선부침, 돼지고기볶음, 된장찌개, 김치와 젓갈, 고추절임 등 반찬이 걸집니다. 극구 사양해도 함께 점심을 먹자고 밥을 떠밀어 주십니다. 함께 먹는 밥은 언제나 맛있습니다. 할머니들은 각자 밥그릇에 밥을 푸지 않고 큰 양푼 하나에 밥을 담아 놓고 함께 드십니다. 같은 밥을 먹는, 그야말로 식구입니다. 고추장아찌가 새콤해서 자꾸만 손이 갑니다. 식초와 젓국을 넣고 담은 거라 감칠맛이 있습니다. “고추가 너무 맛있네요.” 김영이 할머니가 바로 받아칩니다. “꼬추가 언제나 맛나고 개운커든.” 옆의 할머니는 농을 치는 김 할머니가 살짝 못마땅하십니다. “고추니 붕알이니 엔간이 씨부리라.” 할머니들 농담이 걸쭉합니다. 통영시 용남면 지도리. 면적 1.459㎢의 작은 섬에 118세대 269명(2012년 통계) 주민들이 살아갑니다. 지도(紙島)는 ‘종이섬’이지만 종이와는 무관한 섬입니다. 종이섬이란 이름은 와전된 것입니다. 지도는 본래 종해도(終海島)였습니다. 통영 땅이 고성현에 속했을 때 고성의 가장 동쪽 끝 섬이라 종해도라 했습니다. 이후 종이섬, 종우섬, 종섬 등 한글 이름으로 불리다 다시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지도가 됐습니다. 대체로 한자 표기만으로 지명 유래를 찾다보면 엉뚱한 결과가 나오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지도에서는 미더덕, 오만디 등을 키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지도 앞바다는 미더덕과 오만디 밭입니다. 미더덕, 오만디 양식 덕에 고향을 떠났던 젊은 사람들이 다시 들어와 정착하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오만디는 뭘까? “그기 미더덕 아재비라. 맛있어요.” 우리가 흔히 식당에서 먹는 해물찜이나 해물된장 등에 들어가 토독 씹히는 미더덕이라는 것은 실상 미더덕이 아닙니다. 오만디입니다. 진짜 미더덕은 값이 비싸니 미더덕 사촌을 미더덕이라고 쓰는 것입니다. 동부, 서부, 거망 마을까지 세 개의 자연부락이 있는데 거망마을이 가장 작습니다. 20여 가구 대부분이 노인들입니다. 그마저도 할아버지들은 다들 일찍 가시고 할머니들만 남았습니다. “여 있는 사람은 할아버지 한 개도 없다. 전수 홀어멈들이다.” 김영이 할머니는 노인당의 분위기 메이커입니다. 머리에 옥비녀를 하셨습니다. 촌에 가도 아직껏 비녀를 꽂고 사는 할머니는 드뭅니다. 할머니는 고성군 동해면 감서리 하감마을이 고향입니다. 스무살에 지도로 시집을 와 55년을 살았습니다. 옆의 할머니 말씀. “그때는 스므살이면 노처녀지. 다들 열다서 여섯에 시집갔으이. 내는 열아홉에 오니까 환갑 먹은 처녀 왔다고 난리더구마. 어찌 그 시절에 스므살 묵도록 있었노.” ▲추녀 끝 찬바람에 메주는 익어가고Ⓒ강제윤 바람은 불어쌓고 이 내 집은 어찌 가노 할머니는 젊어서는 고향에도 더러 다니기도 했지만 나이 들어서는 통 가본 적이 없습니다. “부친 모친 가시고 나니 갈 일이 있나.” 이제는 할머니가 스스로 고향이 되셨습니다. 타향 사는 자식들의 고향. 자신의 고향은 잊어버리고 자식들의 고향이 되신 어머니. 세상의 어머니들은 누구나 자식들의 고향입니다. 할머니의 남편은 서른일곱 젊은 나이에 이승을 하직했습니다. 남겨진 아내는 서른 셋 청상이었습니다. 남편은 군대에 있을 때 구타를 당해 늑막염을 앓았습니다. 한국전쟁 직후였습니다. 가족들이 제대를 할 수 있도록 힘을 썼습니다. 당시 돈으로 "600원을 주고" 빼왔습니다. 집에 돌아온 남편은 끝내 병이 낫지 못하고 15년 동안이나 앓았습니다. 남편은 아무 일도 못하고 집에서만 지내다 결국 이승을 버렸습니다. 청상은 "아들 두 개 딸 다섯 개 키운다고 쌔가 다 빠져 뿌리고" 어느새 노인이 됐습니다. 농토도 없고 여자 혼자 몸으로는 뱃일도 할 수 없어서 내내 "넘의 집 일만 해주고" 살았습니다. "밭도 매주고, 오줌도 져주고" 곡식을 얻어다 먹고 살았습니다. 밤새워 베틀을 밟아가며 베도 짜고 그것으로 자식들을 키웠습니다. 할머니는 이내 그 시절 부르던 베틀 노래 한 자락을 뽑으십니다. "세상살이 막심하여 옥난간에다가 베틀을 치랬더니 배틀 다리 4형제는 동서남북 갈라놓고 잉엣대는 3형제라 양쪽 어깨 총을 매고 섰는구나.” 그 시절 시름을 잊기 위해 불렀던 서글픈 노래가 이제는 경쾌한 가락이 되었습니다. 세월을 이겨내고 얻은 소리. "세월아 네월아 오고 가지를 말아라. 아까운 청춘들 다 늙어 간다." 할머니는 그저 툭툭 내뱉는 말씀에도 가락이 실립니다. 흥을 내는 것이 아니라 할머니 자체가 흥 덩어리입니다. 노래를 잘해서 "노래자랑 나가 대상도 타고" 그랬던 솜씨입니다. "갈맹이는 어디로 가고 물드는 줄 모르는가 사공은 어딜 가고 배 뜨는 줄 모르는가 우리 님은 어딜 가고 날 찾을 줄 모르는가 술러덩 술러덩 배 띄워라" 먼저 간 남편을 그리는 할머니의 눈자위가 붉습니다. “혼자 몸이 되고서 날이 날마다 앉아 울고 너는 너는 어디 가고 나 혼자서 고생하냐." 할머니의 사설에 가락이 실립니다. 그렇게 한 세월 시름을 달래 왔던 터입니다. 김영이 할머니만이 아니라 경로당에 나와 계신 할머니들은 모두가 남편들을 먼저 보냈습니다. 그런데 할머니들에게는 그것이 천만다행입니다. "할아버지는 먼저 가야해. 우리 앞에 보내고 지가 있으면 을매나 고생했겠노." 세월의 힘인가. 원망은 사라지고 애틋함만 남았습니다. 어느새 날이 저뭅니다. 종일 회관에 모여 놀다가도 노인들은 밤이면 모두들 자기 집으로 돌아갑니다. 짧은 거리지만 이 맹렬한 추위에 늙은 몸으로 문 밖을 나서는 것이 걱정입니다. 여든다섯 할머니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립니다. 이 또한 가락입니다. "바람은 꽁꽁 불어쌓고 이 내 집은 어찌 가노." 거망 마을회관 지붕 위로 어둠이 깃듭니다. ▲몽유통영도원도Ⓒ이상희 [해산물 요리 향연에 예술가들의 자취 가득한, 통영] 통영은 경상도가 아니었다! 맛의 고장, 전라도 태생인 내가 처음 경상도 통영에 매혹된 것은 오로지 음식 때문이었습니다. 통영이 전라도 음식에서 발견되던 개미 진 맛의 유전자가 경상도에도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기 때문이지요. 경상도 음식은 맛없다는 편견을 깨뜨려준 도시 통영. 특히 해산물 요리에 관한한 통영은 이 나라 으뜸입니다. 그중에서도 겨울 통영의 맛은 극상이지요. ‘통영은 맛있다’는 찬탄이 절로 나올 정도입니다. 골목으로 들어서면 아직 8천 원짜리 회정식을 파는 집이 있고 뚝배기 하나를 시켜도 생굴이나 멸치회무침 등이 반찬으로 나옵니다. 그중에서도 압권은 역시 ‘다찌집’이죠. 다찌집이란 술을 시키면 안주는 그날그날 주인 마음대로 내주는 선술집입니다. 관광 다찌가 아니라 지역 사람들이 애용하는 다찌 집을 잘만 찾아가면 겨울에 맛볼 수 있는 거의 모든 해산물을 한상에서 받아볼 수 있습니다. 그것도 이미 만들어놓은 식은 음식이 아니라. 즉석에서 해주는 대면 요리입니다. 최근에 자주 가는 단골 다찌집에서 헤아려보니 회를 포함한 싱싱한 해산물의 수만 11가지나 된 날도 있었습니다. 방어회, 전복, 멍게, 호래기, 개불, 피조개, 오징어, 참소라, 굴, 해삼, 해삼내장젓. 통영이 아니면 불가능한 차림입니다. 시금치나 몰 등의 나물류도 더없이 맛깔스럽습니다. 개조개 유곽이나 해물잡채 등 통영 아니면 맛볼 수 없는 진귀한 요리들도 나옵니다. 경상도 음식을 얕잡아 보던 전주나 목포 사람들도 통영 다찌 음식을 한번 맛보고 나면 엄지를 치켜듭니다. 대체 통영이 유독 맛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이 궁금해서 나그네는 통영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물로 <통영은 맛있다>란 제목의 책까지 낸 바 있습니다. 처음엔 통영사람들에게 통영이 특별히 맛있는 이유를 물어봐도 속 시원하게 대답해 주는 이가 없었습니다. 조선시대 높은 벼슬아치가 통영을 다스렸기 때문에 한양에서 궁중음식 문화를 가져온 것이 이유가 아니겠느냐 짐작할 뿐이었습니다. 납득이 되지 않았지요. 그렇다면 왕이 살았던 서울의 음식이 가장 맛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같은 고위직이 다스리던 다른 지역도 다 맛있어야지 않겠는가. 그런데 서울음식 맛있다는 소리 들어보질 못했습니다. 그래서 통영 맛의 근원을 파헤쳤던 것입니다. 결론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조선시대 내내 통영은 경상도가 아니었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삼도수군통제영의 본영이 있던 통영은 어느 지역보다 물산이 풍부했다는 점입니다. 맛이란 물질적 풍요 속에서 나옵니다. 전라도의 음식문화가 발달한 이유는 배후에 호남평야나 나주평야 같은 곡창 지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배 채우기도 급급하다면 맛을 따질 여유가 없을 겁니다. 요리가 발달할 수도 없습니다. 부가 있어야 요리도 발달하게 됩니다. 아무리 맛있는 도미라도 맨날 구워 먹기만 하면 질리기 마련이지요. 그래서 도미의 뱃속을 가르고 소고기와 야채를 다져 넣고 삼색 지단을 올린 뒤 쪄내는 도미찜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멋을 부리며 음식문화가 시작되는 것이지요. 통영 음식문화의 발전 또한 조선 최대 군사도시 통영의 물적 기반과 남해바다의 풍부한 해산물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해로교통이 활발했던 과거에 수군사령부인 통영으로 각지의 물산과 문화가 자유롭고 활발하게 유입되었습니다. 풍부한 식재료와 여러 지방의 음식문화가 하나로 융합되어 통영의 음식문화가 발전했던 것이지요. 통영이 경상도 타 지역과는 차원이 다른 뛰어난 음식문화를 형성할 수 있었던 역사적 배경입니다. 통영은 조선시대 500여 척의 전함과 수군 3만 명 이상이 주둔한 최고의 군사도시였습니다. 군수물자가 넘치니 물산이 풍요로울 수밖에 없었겠지요. 심지어 화폐를 발행하는 주전소까지 있었습니다. 게다가 통영은 1602년 공사를 시작해 1604년에 완공된 신도시였지요. 임진왜란 직후 여수에 있던 삼도수군통제영이 통영 땅으로 옮겨오면서 전라도 출신 군사들이 대거 이주해 왔고 여기에 경상도와 충청도 지역 병사들까지 합류했습니다. 군수품을 조달하는 12공방을 만들면서 8도에서 가장 뛰어난 장인들을 불러왔습니다. 또 전국 각지의 상인들이 군수품을 조달하기 위해 통영으로 몰려와 살았습니다. 경상도 땅에 생긴 도시에 전라도를 주축으로 한 전국 각지의 사람들이 뒤섞여서 만들어진 융복합 도시가 통영이었습니다. 게다가 경상도 관찰사나 삼도수군통제사 같은 직급이었으니 지휘를 받을 일이 없었습니다. 통영은 특별자치구역이었습니다. 통영과 경상도는 동급이었던 것이지요. 그 기간이 통제영이 폐영 되는 1895년까지 무려 3백 년 동안이나 지속됐습니다. 3백 년 동안 통영은 경상도가 아니었고 그 문화 또한 통영만의 독자적인 것이었습니다. 지금처럼 육로가 발달하지 못했던 과거에는 바다가 고속도로였으니 통영은 길이 불편한 경상도 내륙보다는 수로를 통해 경상도 해안이나 전라, 충청 등 타 지역들과 더 적극적인 문물교류를 했습니다. 군사도시인 까닭에 양반보다는 중인들이 주축이었고 장인들의 수공업과 객주, 상인들의 상업 활동이 전국 어느 곳보다 활발했지요. 많은 통영 사람들이 나전칠기, 소목, 화공 등 12공방의 일을 3백 년 동안이나 가업으로 이어오면서 그들의 몸속에는 예술적 유전자가 형성됐습니다. 음악가 윤이상의 아버지도 유명한 소목장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과 가깝고 교류가 활발했던 까닭에 서양문물이 어느 곳보다 먼저 유입될 수 있었습니다. 1914년에 이미 ‘봉래좌’란 극장이 들어섰고 1930년대는 영화사가 2곳이나 있었지요. 통영삼광영화사는 1930년에 김유영 감독의 <화륜>을, 1931년에는 이구영 감독의 <갈대꽃>을 제작하기도 했습니다. 대표적 친일연극인 유치진이나 세계적 음악가 윤이상, 소설가 박경리, 시인 유치환, 김상옥, 김춘수, 화가 전혁림 등 통영 출신 예술가들이 거목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도 모두 통제영 12공방에서 비롯된 예술적 유전자와 신문물을 일찍 수용할 수 있었던 통영의 역사, 지리적 요인들 때문입니다. 그래서 통영은 음식문화 또한 지금의 경상도 다른 지역에 비해 유독 빼어난 전통을 이어 올 수 있었습니다. 아무튼 술꾼들이나 해산물을 좋아하는 미식가들에게 겨울 통영은 천국입니다. 해산물이 가장 풍성하고 맛있는 시기가 겨울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겨울이 어디보다 따뜻합니다. 서울이 영하 10도 일 때 통영은 영상입니다. 무려 십도 이상 따뜻하죠. 겨울 통영을 찾지 않으면 후회할 이유입니다. ▲뜨겁게 소멸해가는 통영의 저녁Ⓒ이상희 해산물 요리의 알파와 오메가, 다찌 싱싱한 제철 해산물은 발품만 팔면 어느 바닷가에서든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딜 가든 우리가 맛볼 수 있는 요리는 제한적입니다. 봄이면 쭈꾸미나 도다리회 한 가지만 수북하게 쌓아놓고 배가 터지도록 먹어야 하고 가을이면 대하만 질리도록 먹어야 합니다. 아무리 맛난 음식도 물리도록 한 가지만 먹어야 하는 것은 고역입니다. 맛있는 해산물을 조금씩 다양하게 맛볼 수는 없을까요. 생선회도 조금, 생선구이도 조금, 쭈꾸미도 조금, 꽃게도 조금, 멍게도, 굴도, 도다리도, 물메기도 조금씩 다 맛볼 수는 없는 걸까요. 통영에서는 가능합니다. 다찌집이 있기 때문입니다. 통영의 다찌집에서는 계절마다 제철 생선회와 해산물들이 다 있습니다. 싱싱함과 맛깔스러움, 무엇 하나 나무랄 데가 없습니다. 경상도 음식은 맛없다는 편견을 보기 좋게 깨주는 곳이 통영의 다찌집입니다. 술을 시키면 안주는 주인이 주는 대로 먹는 술집이 다찌입니다. 다찌집에서는 그날그날 시장에 나온 식재료에 따라 메뉴가 바뀌고 계절마다 제철 음식이 나옵니다. 전주의 막걸리 골목처럼 다찌는 본래 술값만 받고 안주값은 안 받는 술집문화입니다. 대신 술값이 좀 비쌉니다. 술값에 안주값이 포함되니 그렇습니다. 하지만 안주를 생각하면 결코 비싼 것이 아닙니다. 음식만으로도 충분한 값어치를 하고도 남지요. 요즘은 다찌에서도 수지타산을 맞추기 어려워 기본요금을 받기도 합니다. 대체로 통영 사람들은 다양한 해산물 안주를 원하지만 안주를 많이 먹는 편이 아닙니다. 맛있는 안주를 고루고루 조금씩 먹는 것을 즐깁니다. 다찌 문화가 유행할 수 있는 배경이지요. 통영 사람들도 다찌의 어원은 잘 모릅니다. 통영문화원 김일룡 관장은 다찌가 “일본 선술집을 뜻하는 다찌노미(立飲み)에서 왔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이름의 유래야 어떻든 다찌집은 통영 해산물요리의 알파요 오메가입니다. 타락죽처럼 부드러운 물메기국 물메기의 표준어는 꼼치입니다. 꼼치는 동서남해 모든 바다에서 납니다. 지역마다 그 이름도 각각이지요. 동해에서는 곰치, 물곰, 남해에서는 미거지, 물미거지, 서해에서는 잠뱅이, 물잠뱅이 등으로 칭합니다. 통영에서는 흔히 '미기' 혹은 ‘메기’ ‘물메기’라 부릅니다. 물메기는 동중국해에서 여름을 나고 겨울이면 산란을 위해 한국의 연안으로 올라옵니다. 12월에서 3월까지의 물메기가 맛있는 것은 산란을 위해 살을 찌우기 때문입니다. 보통 수명은 1년 남짓. 대부분 산란 후 죽습니다. <자산어보>에도 물메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잡히면 버리는 하찮은 물고기가 아니라 술병까지 고치는 명약으로 대접받았다 합니다. "고기 살은 매우 연하다. 뼈도 무르다. 맛은 싱겁고 곧잘 술병을 고친다."(정약전 <자산어보>)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도 "우리나라 호남 부안현(扶安縣) 해중에 수점(水鮎, 물메기)이 있는데, 살이 타락죽(찹쌀우유죽) 같아 양로(養老)에 가장 좋다"고 했습니다. 옛 기록들이 아니더라도 물메기국은 그야말로 해장에 최고입니다. 물고기들이 흔하던 시절에는 지금처럼 귀한 대우를 받지는 못했겠지만 물메기 또한 어류의 가계에서 제법 족보 있는 물고기였던 셈이지요. 늦가을부터 통영은 물메기국 끓이는 철이 시작됩니다. 동해안에서는 곰치, 물곰이라고도 하는 물메기. 곰치국이든 물메기국이든 해장국으로 그보다 더 시원한 음식은 드물 것입니다. 물론 대구나 복국이 있지만 시원하고 담백하기로는 물메기국을 따라가기 힘듭니다. 지방이 아주 적고 아미노산이 풍부해 감칠맛이 납니다. 통영에서 마른 메기는 잔치음식의 대표지요. 전라도 잔치상에 홍어가 빠지면 차린 것 없단 소리를 듣듯이 통영의 잔치집에서는 마른 메기찜이 빠지면 '안꼬 없는 찐빵'이라 합니다. 물메기국은 맑게 끓여야 제 맛입니다. 너무 매운 ‘땡초’(고추)도 넣지 말아야 합니다. 팔팔 끓는 물에 무를 어하게 썰어 넣고 소금 간을 한 뒤 무가 익을 즈음에 손질해둔 메기를 넣고 익힙니다. 살이 무른 생선이니 너무 끓이지 않고 살이 익을 정도로만 끓입니다. 다진 마늘을 넣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국을 낼 때 대파를 얹습니다. 그래야 맑고 시원한 메기국이 됩니다. 양파 등 다른 채소를 넣지 않는 것도 물메기 본연의 맛을 살리기 위함입니다. 통영에서는 세파에 시달려 지친 사람들의 속을 물메기국이 달래줍니다. 술병도 곧잘 고쳐주는 물메기국의 유혹을 누군들 피해 갈 수 있으리오. ▲내내 해변을 따라 걷는 십리길. 삼칭이 해안길Ⓒ섬학교 윤이상 : 유럽 5대 작곡가, 사상 최고의 음악가 44인 윤이상 선생은 1917년 9월 17일 경남 산청군 덕산면에서 부친 윤기현과 모친 김순달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1920년 가족들과 함께 통영으로 이주해서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통영은 윤이상의 선조들이 통제영이 시작될 때부터 대대로 살았던 땅입니다. 윤이상 의 선조는 세병관을 세우는데 공헌한 사람 중 한 분이었고 증조부까지 선조들은 대부분 수군 장교로 통제영에 복무했었다 합니다. 출생지는 산청이지만 삶의 자양분을 얻고 그를 키운 고향은 통영이었습니다. 윤이상은 그의 자서전격인 루이제 린저와의 대화 <상처 입은 용>에서 고향 통영에 돌아가 노년을 보내다 그곳에 묻히고 싶다고 소망했습니다. "어느 날 은퇴해 고향으로 돌아가 그저 조용한 바닷가에 앉아 물고기를 낚고 마음속으로 음악을 들으면서 위대한 고요함 속에 내 몸을 뉘였으면 합니다. 또 나는 그 땅에 묻히고 싶습니다. 내 고향 땅의 온기 속에 말입니다." 하지만 그의 소박한 꿈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도천테마파크에는 윤이상의 동상이 있고 2층 전시실에는 윤이상의 흉상이 있습니다. 살아생전 그토록 고향에 오고 싶어 했으나 조국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그는 회한을 품고 이승을 하직했겠지요. 그 대신 그의 동상이 고향 통영으로 왔습니다. 2층 전시실의 흉상은 평양 윤이상연구소에 있는 흉상을 만수대창작사에서 복제해 준 것입니다. 윤이상평화재단의 의뢰로 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흉상 또한 2009년 6월 인천항으로 반입됐으나 북한의 핵실험 후 정부의 반입보류 조치로 오랫동안 인천세관 창고에 보관되어 있다가 통영예총의 탄원으로 어렵사리 통영으로 왔습니다. 윤이상의 흉상 또한 생전의 윤이상처럼 고초를 겪었으니 그는 분단의 비극을 사후에까지 온몸으로 체현하고 있는 셈입니다. 윤이상은 생존 당시 현존하는 유럽 5대 작곡가에 선정됐고 뉴욕 브루클린 음악원의 교수들에 의해 사상 최고의 음악가 44명 중 한 명으로 뽑혀 이름이 동판에 새겨지기도 했습니다. 20세기 작곡가로는 윤이상과 스트라빈스키 등 네 명뿐입니다. 윤이상은 동백림사건으로 간첩 누명을 쓰고 투옥생활을 했지만 후일 고문에 의해 조작됐다는 사실이 밝혀져 누명을 벗었습니다. ▲통영에서 그린 이중섭의 대표작 <황소>Ⓒ이중섭 이중섭, 통영에서 황소를 그리다 이중섭이 그의 자화상 같은 <흰소>와 <황소> 등 소 연작을 그린 장소는 통영입니다. 통영에 살던 시절, 이중섭은 또 다른 대표작 <달과 까마귀> <부부> <도원> <가족>은 물론 <통영 풍경> <통영 유원지> <충렬사 풍경> 등 통영을 배경으로 한 다수의 작품을 남겼습니다. 통영에는 이중섭이 머물며 그림을 그렸던 건물이 아직도 건재합니다. 이중섭은 한국전쟁 피난시절인 1952년 봄에 통영으로 와서 1954년 봄에 떠났으니 만 2년을 통영에서 살았습니다. 소련의 비평가들에게 마티스나 피카소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고 원산미술가동맹 위원장까지 지냈던 이중섭은 1.4후퇴 때 가족들과 원산에서 부산으로 남하 한 뒤 해군경비정을 얻어 타고 제주 서귀포에 들어가 7개월을 살았지요. 그는 1952년 다시 부산으로 나와 생계가 어려워지자 아내와 아이들을 일본으로 보낸 뒤 부두노동자로 전전했습니다. 그때 이중섭을 통영으로 이끈 이가 유강렬이었습니다. 후일 홍익대 산업미술대학원장을 지낸 유강렬은 당시 통영에 있던 경남도립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이하 양성소) 주임강사였습니다. 통영에서 이중섭의 근거지가 됐던 양성소는 통영시 항남동 241-1번지, 현재 항남목욕탕 부근입니다. 통영 시절 이중섭은 3번의 전시회를 열었는데 1952년 녹음(호심)다방에서 전혁림, 유강렬, 장윤성과 함께 <서양화 4인전>을 가졌고, 1953년 12월에는 성림다방에서 40여 점의 작품으로 개인전을 열기도 했습니다. 녹음다방 건물은 더 이상 다방이 아니지만 여전히 유치환이 이영도에게 5천 통의 연서를 보냈던 바로 그 중앙우체국 건너편에 옷가게로 변신해 존재합니다. 복자네집이나 새미집 등이 단골 술집이었는데 이중섭은 새미집 다다미방 바닥에 잉크를 부어 손으로 그림을 그리다 주인할머니의 타박을 받은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경남도립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는 본래 2층짜리 청루 건물이었는데 이를 학교로 바꾼 것입니다. 청루는 기생이 있는 요정입니다. 양성소 부근이 일제 때는 청루 골목이었습니다. 이중섭은 양성소 강사가 아니었으나 늘 이 건물에 살다시피 했고 항상 스케치북을 들고 와 스케치를 했다합니다. 소 연작과 대표작들도 이 건물에서 구상되고 그려졌을 것입니다. 통영 시절 이중섭의 작품 활동 근거지였던 양성소 건물은 1930년대 초에 지어졌지만 별 훼손 없이 원형을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1층은 식당 영업 중이고 2층은 DVD 게임랜드였다가 카페로 바뀌었으나 이내 문을 닫고 지금은 비어 있습니다. 2층의 일부는 살림집으로 이용 중입니다. 최근 주인이 매물로 내놨다는데 통영시 문화관광과에 문의해 보니 시에서는 매입해 보존할 계획이 없다고 합니다. 안타까운 일이지요. 이중섭(1916∼1956)이 통영 시절 완성한 <흰소> <황소> 등 소 연작은 이중섭 작업의 백미로 꼽힙니다. 이중섭은 젊은 시절부터 소에 대한 애착이 깊었습니다. 한번은 원산의 송도원 들판에서 끊임없이 소들을 관찰하다가 소도둑으로 오인 받았을 정도입니다. 아마도 이중섭이 들판에서 소를 관찰하는 동안 소들은 하나 둘씩 이중섭의 몸 안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고 살기 시작했던 것이 아닐까요. 소들이 살면서 이중섭의 몸 안에는 드넓은 초지가 생겼고 날마다 소떼가 풀을 뜯었습니다. 한국전쟁 동안 피난민으로 떠도는 와중에도 이중섭은 소들을 키웠습니다. 자신은 굶어도 소들은 풀을 먹였습니다. 오랜 세월 키우던 소떼와 함께 이중섭은 통영으로 왔습니다. 통영에서 이중섭은 문득 깨달았습니다. 제 안에 기르기엔 소들이 너무 커버렸다는 사실을. 이중섭은 마침내 기르던 소들을 풀어줘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풀려난 소들이 이중섭의 손끝을 타고 화폭으로 마구 쏟아졌습니다. 이중섭의 화폭 위에서 흰소도, 황소도, 포효하는 소도 마구 뛰어다녔습니다. 이중섭의 소들은 여전히 살아서 펄펄 뛰고 있습니다. 이중섭이 소들을 화폭에 가두지 않고 풀어놓았기 때문입니다. 이중섭이 기르던 소떼를 대중들에게 처음 선보인 것도 통영이었습니다. 이중섭은 통영으로 왔던 1952년 통영의 녹음다방에서 전혁림, 유강렬, 장윤성과 함께 4인전을 했는데 전혁림은 그날을 이렇게 회고합니다. 그날의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듯 생생합니다. “장윤성이하고, 유강렬하고, 나하고, 중섭이가 모여서 그림 팔려고 한 거 아닙니까? 팔렸어! 나 그림은 서울 사는 부인이 다방으로 들어오더마는 현장에서 돈을 주고 사가고 그란께 딴 사람들이, 중섭이가 혀를 헤 내밀더만. 중섭이 <소>는 딴 사람이 샀어요. 그때 돈으로 8만원이라고 하드나.” (구술집 <전혁림 다도해의 물빛 화가> 중에서) ▲낡은 것도 문화다! 동피랑 벽화마을Ⓒ섬학교 마을공동체의 ‘오래된 미래’, 동피랑 벽화마을 벽화마을로 유명한 동피랑. 동피랑이 지금은 통영의 랜드마크가 됐지만 동피랑은 오랫동안 통영의 대표적 달동네였습니다. 2007년 통영시에서도 동피랑 재개발 계획을 세웠습니다. 동피랑 꼭대기에는 옛날 통영성의 세 망루 중 하나였던 동포루 터가 있습니다. 시에서는 동피랑 마을을 전부 철거한 뒤 동포루를 복원하고 그 일대는 공원으로 만들 계획이었지요. 그때 오래된 마을과 골목, 삶의 흔적들이 사라져버리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 지방의제 추진기구 '푸른통영21'에서 재개발 대신 보존을 제안했습니다. 마을을 무작정 철거하기보다는 “지역의 역사와 서민들의 삶이 녹아있는 독특한 골목 문화로 재조명 해보자”고 시를 설득했지요. 오래 되고 낡은 마을과 골목길 또한 소중히 보존해야 할 문화재라 판단한 것입니다. 사실 이런 오래된 마을이야말로 진정 살아 있는 문화재가 아닌가요. 대부분 고령인 동피랑 주민들도 마을을 떠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정든 마을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었지요. 다행히 주민들과 시민단체, 통영시가 한마음이 됐습니다. 재개발 계획을 중단하고 마을을 보존하기로 합의한 것입니다. 낡은 마을을 새롭게 변신시키기 위해 낡고 갈라진 벽에다 그림을 그리기로 했습니다. 온 마을에 벽화가 그려지자 죽어가던 마을이 살아나기 시작했지요. 낡은 건물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는 것은 자본이 아니다. 사람들의 손길입니다. 전국에서 몰려온 화가와 자원봉사들의 힘으로 벽화가 완성되자 소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습니다. 사람들이 벽화와 골목길, 동피랑 언덕 아래 통영 바다 풍경을 보기 위해 구름처럼 몰려들었지요. 단지 채색의 옷만 갈아 입혔을 뿐인데, 그림만 그렸을 뿐인데 동피랑은 새롭게 태어났고 어느새 통영의 아이콘이 됐고 랜드마크가 돼버린 것이지요. 용역들에 의해 철거될 뻔했던 낡은 집과 오래된 골목에 벽화가 그려지면서 관광객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고 동피랑 마을은 다시 살아났습니다. 동피랑. 통영말로 ‘피랑’은 벼랑 혹은 비탈을 뜻합니다. 동쪽 벼랑이 곧 동피랑입니다. 동피랑은 오랜 세월 가난한 사람들이 살아온 동네입니다. 지금이라고 다를까요. 동피랑의 집들은 대부분 10평 내외의 작은 주택들입니다. 골목의 어떤 집에서는 아직도 저녁마다 군불을 지펴 난방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동피랑은 이제 더 이상 달동네가 아닙니다. 누구나 오르고 싶어하는 꿈의 언덕입니다. 파괴를 통한 개발이 아니라 낡고 오래된 것의 보존을 통해 이루어낸 작은 기적입니다. 은하수 물을 끌어와 병장기를 씻다, 세병관 국보 제305호 세병관은 통영의 상징입니다. 세병관은 통제영의 객사였습니다. 객사란 본래 고려, 조선시대 관아의 중심 건물이었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객사의 형태가 표준화되었으며 전국에 360여 개의 객사가 설치됐었지요. 현재는 그중 10여 곳만이 남아 있습니다. 지방관청에서 수령이 집무를 보는 동헌이 높은 건물인 줄 알지만 실상 가장 격이 높은 건물은 객사였습니다. 국왕을 상징하는 건물이기 때문이지요. 동헌은 객사 동쪽에 있다 해서 동헌입니다. 객사에는 국왕의 전패를 모셨습니다. 그래서 지방관으로 부임하는 관리들은 가장 먼저 객사를 찾아 예를 올려야 했습니다. 세병관 현판은 36대 통제사 서유대의 글씨입니다. 세병관의 세병은 두보의 시 <세병마행(洗兵馬行)>의 ‘만하세병’이란 구절에서 따왔습니다. 만하세병은 ‘은하수를 끌어와 병장기를 씻는다’는 뜻입니다. 시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습니다. 安得壯士挽天河(안득장사만천하) 淨洗兵甲長不用(정세병갑장불용) “어떻게 하면 힘센 장사를 얻어 하늘의 은하수를 끌어다가, 병기를 씻어내어 길이 사용하지 못하게 한단 말인가.” 두보는 안녹산의 난(755∼763) 때 포로가 되는 등 숱한 전쟁의 참혹함을 직접 겪은 사람입니다. 그러니 평화에 대한 바람이 그토록 간절했던 것이지요. 은하수 물로 무기를 씻는 뜻은 전쟁을 준비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전쟁을 영원히 끝내기 위함입니다. 임진왜란이란 참혹한 전쟁을 겪었던 이 땅의 평화를 바라는 열망이 이 건물의 현판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습니다. ▲세병관에서 삼도수군통제영 행사의 재현Ⓒ이상희 2021년 2월 6(토)-7(일)일, 섬학교 제95강 <지도(紙島) 걷고 통영 맛보기>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2월 6일(토)> 07:00 서울 출발(0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섬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95강 여는 모임 -통영 도착 -점심식사(통영식 해물탕) -통영 원평 출발 -지도 서부마을 도착 -지도 걷기(3km) 서부(갈바지)→동부(새바지)→거망(걸맹이)→서부(갈바지) -지도 서부마을 출발 -통영 원평 도착 -박경리기념관 -달아전망대 일몰 -저녁식사(다찌집에서 제철 생선회와 해물모듬, 구이 등 해산물의 향연) 20:00 자유시간 및 취침(다인실) <2월 7일(일)> 07:00 기상. 아침 산책 -아침식사(물메기탕 혹은 대구탕) -삼칭이 해안길 걷기(4km) -세병관 -점심식사(자유식) 및 자유시간 14:00 서울 향발. 제95강 마무리모임 *상기 일정은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변경될 수 있습니다. ▲2월의 섬학교 답사 지도Ⓒ섬학교 2월 섬학교 제95강의 준비물, 참가방법, 참가비 등 자세한 내용은 인문학습원의 <학교소개>에서 안내 받으세요. 또한 기사 게재 후의 변동사항도 인문학습원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섬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섬 여행을 떠나기 전에 강제윤 교장선생님이 쓴 <전라도 섬맛기행> <당신에게, 섬> <신안> <섬택리지> <섬을 걷다> <걷고 싶은 우리 섬> <어머니전> 등 섬 답사기를 참고하면 섬 여행의 의미가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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