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 불, 심연의 빛
‘역사를 잊은 국민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이 있다. 역사를 기억하고 지키는 것이 민족의
존재와 미래를 결정짓는 핵심이라는 경고와 독려의 메시지이자 개인은 물론 사회를 구성하는
문화 정체성의 근원인 기억과 정신을 존중하고 재인식하는 것이 과거와 현재를 연결해 미래의
길을 모색하는 중요한 원리로 작동한다는 점을 이야기하는 문구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억과
성찰이 희미해진 현대 사회에서, 한국전쟁 이후 눈부신 성장과 K-컬처의 세계적 확산 속에서
개인은 오히려 점차 소외되었다. 눈부신 발전 이면에는 물질주의와 왜곡된 개인주의가 고립과
혼란을 낳고, 인간성 상실과 자연 파괴 같은 문제가 드러났다.
이번 부산국제사진제는 ‘혼불’이라는 주제를 통해 현대 사회가 잊고 지나친 한국의 정신과
문화를 돌아보고 인간 존재의 본질과 공동체적 가치를 되찾으며 나아가 역사와 화해, 집단적
극복, 자연과의 공존 등 우리 사회가 가져가야할 미래 가치를 이야기하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한다.
〈혼불, 심연의 빛〉은 개인과 공동체의 깊고 어두운 내면을 직시하며 그 속에 숨겨진 빛, 즉
희망과 에너지를 한국 문화와 전통의 정서를 통해 발견함으로써 공동체적 성찰과 극복의
가능성에 주목한다. 이에 고통을 상기하는 기록이자 고유한 문화 정신을 환기하며, 한국인의
생명력과 에너지를 탐구하고 정신적 가치와 내면의 본질을 추구하는 작업들이 초대되었다.
하나의 주제 아래 새롭게 재해석된 작품들이 모여 ‘혼불’의 의미를 다각도로 구현하며, 흔들림
없는 공동의 기억을 형성하기를 바란다.
권순관과 성남훈의 노근리와 제주 4·3사건, 조소희의 세월호, 야나 코노노바의 우크라이나
전쟁 작업은 공동체의 지울 수 없는 상처를 통해 고통과 절망의 심연을 직시하게 한다. 반면
김우영의 돌과 황규태의 <녹아내리는 태양>은 우리 안의 생명력과 에너지를 은유하며,
이선주의 보자기, 양재문의 전통춤, 장숙의 늙은 여인의 신체에서 전달되는 한국 고유의
정신과 감각은 공동체적 정서를 단단히 세운다. 또한 박진하의 붉은 설악산, 이종만의 숲,
이갑철의 <충돌과 반동>, 라이너 융한스의 작업은 거대한 자연 앞에서의 겸손과 조화와
공존의 가능성을 일깨우고, 우창원의 마스크, 이완교의 〈피안〉, 한정식의 〈고요〉 앞에서
내면을 발견하고, 존재의 본질과 정신적 가치를 성찰하는 사유의 과정에 이르게 된다.
참여 작가들의 작업은 서로 보완되고 겹쳐지며 심연 속에서 발견한 희망과 깨달음의 서사를
완성한다. 한마디로 규정할 수 없는 ‘혼불’의 의미를 사진의 실재성과 이미지 너머를 사유하게
하는 추상성으로 탐구하며, 전시는 현재와 미래를 잇는 기억의 작업이자 관객이 사유와
성찰을 통해 역사 주체가 되는 과정이 된다. 이는 발터 벤야민이 말한 ‘억압받는 자들의
기억’을 복원하는 진정한 역사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며, 동시에 대한민국 사진 예술의
정체성을 제시하는 한국 사진 발전의 변곡점이 되고자 한다.
큐레이터 이정은